박은 우리 삶 도구이자 훌륭한 먹거리…바가지 긁는 소리는 사람도 쥐도 싫어해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박과 바가지

기사입력 : 2018-01-1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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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초가집 처마에 달려 있던 박. 박은 반찬으로도 애용되고, 껍질을 말려 바가지로도 사용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며칠 전, 약수 좀 떠올까 하여 동네 약수터에 들렀는데 샘가 한편에 앙증맞은 표주박이 눈에 띠었습니다. 모처럼 반가운 마음에 표주박을 이리저리 살펴도 보고, 서너 번 물을 떠 마셔도 보았습니다. 사실 수년전까지만 해도 이 약수터에는 표주박이 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플라스틱 바가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못내 섭섭했는데, 그날 뜻밖의 만남으로 옛 추억에 한층 정감이 더 했습니다.

박은 한해살이 덩굴식물로 호박이나 동아, 수세미, 여주와 같은 범주에 들어가지만, 일반적으로 껍질을 말려 바가지로 사용하는 자루박·조롱박·말박을 통상 ‘박’이라 부릅니다. 특히 가을철 시골 초가 지붕위에 성근 자루박과 돌담을 타고 주렁주렁 야문 조롱박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삶에 요긴한 도구이자 훌륭한 먹거리였습니다.

박에 대한 문헌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진한 사람들(辰人)은 박(호(瓠), 표주박)을 朴(박)이라 부르는데, 혁거세가 깨고 나온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아서 朴(박)을 성으로 삼았다.(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라는 구절로 박의 시원을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고려 말 시인 이규보도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의 ‘가포육영’편에, 박에 대해서 시를 남겼습니다. “쪼개면 표주박 되어 차가운 음료 퍼낼 수 있고, 통째로는 항아리 되어 맑고 좋은 술 담아 둘 수 있네. 박이 떨어진다고 근심하지 마라. 덜 여문 것은 삶아 먹기 좋으니까.”

‘흥부가’ 중 ‘박타령의 잦은 몰이’에도 박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흥부가 들어와, "마누라. 자네 이게 웬일인가? 이리 설리 울면 집안에 무슨 재수가 있으며, 동네 부끄럽소. 울지 말고 이리 오소. 배가 정 고프거든 「지붕에 올라가서 박을 한 통 내려다가, 박 속은 끓여 먹고, 바가지는 팔아」 양식사고 나무 사서 어린 자식 구완을 허세. 우지 마라면 우지 마."❭ 배고파 우는 자식과 아내에게 박으로 요기하고 바가지 만들자는 흥부의 넋두리가 짠합니다.

한편, 농가월령가 8월편에는 “집우에 굿은 박은 요긴한 긔명이라-지붕에 단단한 박은 쓸 만한 그릇이라”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여기서는 박이 바가지로 변신하여 훌륭한 그릇이 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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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에 표주박이 둥둥 떠 있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바가지는 박의 껍질을 쪄서 말리는데, 용처에 따라 이름이 각양각색입니다. 쌀뒤주에 있으면 쌀바가지, 장독 안에 장 종지, 소여물을 담으면 쇠죽바가지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물 뜰 때 쓰면 물 국자가 되고, 밥을 담아두면 밥그릇, 거지가 동냥할 때 지니면 쪽박이라 합니다. 참고로 쪽박은 ‘쪽지’, ‘쪽문’에서와 같이 작은 모양의 바가지를 말합니다.

바가지를 음식 담는 용기로 쓴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기 없이 말린 박에 곡식을 저장하면 습해지지 않고 해충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해 놓은 밥이나 반찬도 바가지에 보관하면 음식의 물기가 마르지 않아 원래의 맛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바가지는 일단 가볍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설령 깨지더라도 바늘로 꿰매어 다시 쓸 수 있었습니다.

박은 음식으로도 별미였지요. 덜 여문 박의 속을 파낸 후 꾸들꾸들하게 말린 것을 ‘박고지’ 혹은 ‘박 오가리’라 부릅니다. 박고지를 들기름과 양념에 버무리면 박나물 반찬거리가 되고, 조청과 간장에 조리면 쫄깃쫄깃한 ‘박 강정’이 되어 겨우내 간식으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엉 대신 박고지를 넣은 박고지 김밥은 분식집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박을 말리지 않고 겉껍질만 벗겨서 생으로 깍두기처럼 썰어 만든 ‘나박 물김치’는 박 요리의 일품이었습니다. 요즘은 박 대신 무로 나박김치를 만들어 먹는데, 충청도 일부지역에서는 여전히 박 껍질로 나박김치를 담근다고 전해옵니다. 여기서 잠깐, ‘나박’이라는 말은 야채를 얇고 네모지게 썬 모습의 의태어입니다만, 혹자는 이 단어가 먹는 무를 뜻하는 중국고어 ‘나복(蘿蔔)’에서 나박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박김치는 본래부터 무김치의 다른 말이라 하는데 크게 납득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요리 말고도 박이 민간요법의 약으로 소용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박 속의 맑은 물을 ‘박물’이라 하여 인삼보다 귀히 여겼으며, 바가지를 불에 태워 그 재로 치질이나 상처에 바르면 효험이 있다고 믿었답니다.

박이 오랫동안 우리 생활과 밀접하다보니, 박에 얽힌 이야기도 참 많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 ‘바가지 긁기’가 있겠습니다. 바가지 긁기는 긁는 소리와 연동되는데 유래는 좀 애잔합니다. 옛날 가난한 집들은 먹을 것이 늘 충분치 못했습니다. 때문에 여럿이 먹기 위해서는 얼마 안 되는 반찬과 밥을 바가지에 담아 일명 '바가지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다투어 한 숟가락씩 먹다보면 금세 바닥이 보였겠지요. 한 톨이라도 더 먹으려고 바닥을 빠드득 빠드득 긁으면 온 몸을 전율케 하는 소리가 나는데 바로 바가지 긁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바가지 긁는 소리는 배고픔의 아우성이기에 결코 기분 좋을 리 없었을 겁니다.

먹고 살만해진 오늘날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내는 잔소리를 바가지 긁기라고 하는데, 두 경우 모두 듣기 싫은 공통점을 갖고 있네요.

한편, 바가지 긁는 시끄러운 소리는 사람만 싫은 것이 아니라 쥐도 매우 꺼렸답니다. 1876년 7월, 우리나라 전역은 바가지 긁는 소리로 진동하였습니다. 그 즈음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하루가 멀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이렇다 할 치료제도 없고 단지 예전부터 콜레라는 쥐가 옮기는 ‘쥣병’으로 알고 있어 쥐를 쫓기 위해 집집마다 바가지를 긁어댔습니다. 그러는 사이 인구 20만의 서울에서만 7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풍습의 한 단면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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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지는 사용 용도에 따라 이름이 다양하다. 쌀뒤주에 있으면 쌀바가지, 장독 안에 장 종지, 소여물을 담으면 쇠죽바가지가 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또한 결은 좀 다르긴 해도 느닷없이 바가지를 깨뜨려 그 소리로 귀신을 쫒는 풍속도 아주 오래전부터 민가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전통 혼례식에서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에 가다가, 신부 집 대문에 다다르면 바가지를 던져 큰 소리 나게 깨뜨립니다. 다른 예로, 초상을 치른 관이 방문을 나서기 전에 문지방에 미리 바가지를 엎어놔 상주가 발로 밟아 바가지를 깨뜨립니다. 무당굿 할 때도 무당은 굿의 당사자 앞에 바가지를 여러 개 두고 어느 순간 모두 깨 버리라고 다그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바가지가 액막이에 쓰이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합근례’란 전통혼례식에서 신랑 신부가 잔을 주고받는 의식입니다. 이때 마시는 술을 합환주(合歡酒)라 하지요. 첫 술잔은 부부로써 인연을, 둘째 잔은 부부의 화합을 뜻합니다. 그리고 술을 담는 잔은 반드시 표주박이어야 했습니다. 표주박은 원래 몸이 하나였다 둘로 나눠진 것이라, 표주박잔의 술을 나누어 마심으로써 비로소 두 사람이 하나가 됨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얼마 지나면 신부는 알게 됩니다. 여자 팔자가 뒤웅박 팔자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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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뒤웅박이란 쪼개지 않고 꼭지 근처만 도려내어 속을 파낸 바가지를 말합니다. 예전에 잘 사는 집의 뒤웅박은 쌀이 넘치고, 못사는 집은 잡동사니만 그득하다 했습니다. 그래서 뒤웅박이 어떤 집에서 쓰이냐에 따라 뒤웅박의 처지가 달라진다는 데서 연유된 것입니다.

도시에 살다보니 기억에서 조차 가물거리는 박과 바가지이지만, 가끔 공원이나 남의 베란다에서 관상용으로 키우는 박이라도 보게 되면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곤 합니다. 근교에 5일장이라도 서면, 찾아가 조롱박 바가지를 구해서 동네 약수터에 놓아두어야겠습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홍남일 기자가 쓴 기사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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