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객이 1100만명이 넘었다는 ‘변호인’을 몇 번이나 보면서, 영화 줄거리와 실제 사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부산사회는 ‘부림사건’과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을 겪으며, 주변 사람들의 아픔이 증가하던 시기였다. 관객 500만명을 돌파한 ‘1987’은 관람하지 않았지만, ‘박종철고문’ 사망사건을 전후한 당시를 기억하면 필자는 울산에 근무하면서 중부교회 주일예배에 가족과 함께 빠짐없이 3년간 참석했다. 부산운동권은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가 결성되고 1985년 부산민주화시민협의회가 결성되어 4•13호헌조치에 항거하며 6월항쟁으로 발전된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목사이기 이전에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 필자에게 간혹, 귀신(貴臣)이라 하시면서, 귀신(鬼神)이 되지 말라고 놀리곤 하셨다. 그러나 성경 시편 등 구약의 해석에서는 연세대학 신학대학 서남동 교수가 인정하는 학자이셨다. 특히 독일 본회퍼 목사와 자신이 고향 포항에서 북한군에게 총살당하는 위기에서 겨우 살아 난 뒤, 목숨을 걸고 도망친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화, 자유와 정의로움 등 한 인간의 처절한 ‘시대적 아픔’과 ‘사람사랑’이 녹아 있었다. 또한 그의 설교내용은 청년들의 상상력과 꿈을 키우면서, 저항정신을 심어주는 문학적인 한편의 서사시였다.
평범하기에도 부족했던 필자와 선생과의 인연은 부산YMCA총무로 재직하시던 1972년, ‘대학Y-영봉클럽’ 결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생은 경영학도에게 돈 버는 방법보다는 인생사는 방법부터 역설하셨다. 선생은 첫 대면부터 ‘로마클럽보고서’의 자원고갈, 환경문제, 인구폭발과 식량문제와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을 말했다. 이후, 피터 드러커 ‘단절의 시대’, 소설가 토스토예프스키 ‘까라마조프의 형제’, 영화 ‘지붕위의 바이올린’, ‘청년문화’, 마틴 루터 킹 목사, 공업화•산업화 문제, 정보지식사회 도래, 21세기 전망 등 당시로서는 쉽게 접하지 못했던 많은 분야들을 일깨워주셨다.
선생은 부산YMCA총무와 중부교회 담임목사시절에는 수사당국의 감시 이외에도 물질과 내분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불의와 아부를 거부하는 ‘최핏대’로 통했다. 필자에게는 ‘부산시 걸인 및 불우청소년 실태조사’ ‘일본 청산학원과의 한•일대학생교류’ ‘부산지역대학생협의회 결성’ ‘부산 KSCF(한국기독학생연맹) 교류’ ‘학생행군대회’를 통해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발전하는 젊은이모임이 되길 지도하셨다. 이 외에도 ‘부산 사회체육센터 육성’과 ‘장애인자활센터 전산전문가 양성’ 등 부릅뜬 눈으로 젊은이들에게 항상 꿈과 영감을 심어주면서 사업을 실행하는 거대한 산성이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된 스승을 모시고, 배우기 어려운 세상이 되고 있다. 존경을 받아야 할 분들이 상식에 벗어난 행각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 공을 세우기 위한 음모술수(陰謀術數), 미래가치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등 다양한 허상들과 오만•편견들이 난무하고 있다. 특히 성경의 ‘축자영감설’이나 ‘무오류설’을 넘어, ‘부패’와 ‘부자세습’ ‘종교세’ 등 한국교회가 주식회사 전형으로 가는 작금의 ‘말기현상’을 보면서, 선생께서 무슨 말로 ‘핏대’를 내세울지가 궁금하다. 필자는 스승의 말씀과 당시의 열정과 회한, 죄스러움을 동시에 간직하고 싶다.
임실근 객원 논설위원(한국스마트유통물류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