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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팔미도에 국내 최초의 등대 설립…日, 기상관측 덕으로 러일전쟁서 승리…깃발색으로 바람 방향도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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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팔미도에 국내 최초의 등대 설립…日, 기상관측 덕으로 러일전쟁서 승리…깃발색으로 바람 방향도 파악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정오에 대포를 쏜 인천 기상대

농업을 근간으로 했던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기상변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전통적인 기상 관측으로, 날씨·풍향·우량(雨量)·우박·우뢰·번개·안개·흙비(土雨)·서리·눈·무지개 등 11가지 항목에 대해 조사를 하여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기록들은 당일에 대한 기상변화를 육안으로 관찰한 것이었습니다. 기상 관측기를 사용해서 정량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 때는 세종대왕 시기이며, 고안된 도구는 측우기와 풍기대입니다. 이를 통해 계량된 관측 자료들은 이듬해 농사 짓는데 활용되었습니다.

19세기 말, 제국 열강들의 압력에 마지못해 조선은 부산·원산·인천을 개항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서울과 가까운 인천항으로 세계 각국의 배들이 몰려왔습니다. 주로 무역선과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여객선이었는데,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섬도 많아서 좌초 되거나 선박끼리 부딪쳐 침몰하는 사고가 빈발했습니다. 당시 해도나 연안 측량이 제대로 되어있지도 않았고, 특히 바다 기상에 대한 사전 정보 부재로 어쩌면 예견된 일이라 볼 수 있었습니다. 조선정부는 재정고문으로 와 있던 묄렌도르프에게 이러한 사정을 듣고 인천 해관(세관)에 근대적인 관측기기와 장비를 갖추어 기상관측을 하도록 합니다. 이는 최초의 근대 기상관측으로 기록되지만, 관측 범위를 연안에 한정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우리나라 기상관측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던 1904년, 일본은 목포·부산·인천·원산에 임시관측소를 서둘러 개설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전역의 기상을 관측합니다. 남의 손에 의해 시작되어 참담한 기분이듭니다만, 어쨌든 우리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한 근대기상관측인 셈입니다.

기상 관측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첨성대.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기상 관측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첨성대. 자료=글로벌이코노믹

일본이 관측소를 서두른 이유는, 청일전쟁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러시아를 제압하지 않으면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곧 전쟁을 의미했고, 전쟁 준비의 하나로 우리나라 기상환경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습니다. 일본군은 여러 관측소 중에서 특히 인천 관측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는 당시 러시아 함대가 인천 월미도 주변에 정박하여 일본군을 감시하고 있었고, 이런 이유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은 인천 앞 바다에서 시작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암암리에 팔미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도 세우고 전쟁용 관측소를 구축했습니다.

1904년 2월 9일, 드디어 인천 앞 바다에서 일본의 함포 사격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루 전에 이미 요동반도 여순 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극동함대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황해해전’이라 불리는 전투에서 일본은 승기를 잡고, 1905년 결국 러시아는 쓰라린 패배를 당합니다. 서해해전에 일본이 우세했던 배경에는 미리 측량한 해상 관측정보가 주효했습니다. 승리를 확신한 일본은 관측소의 중요성을 새삼 느껴, 인천의 임시관측소를 헐고 1905년 1월 응봉산 정상에 건평 69평, 목조 2층의 최신 시설을 갖춘 인천관측소를 정식으로 세웁니다. 이 후 이곳에서 우리나라 전역의 날씨와 연안 및 동북해, 태평양, 일본 해역의 해양 기상관측도 같이 합니다. 러시아와의 해전에서 승리는 거두는데 큰 성과를 본 관측소였기에 일본군은 한반도 곳곳에 관측소를 더 세우게 되고, 차츰 전운이 사라지자 군대뿐만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도 기상관측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천관측소는 얼마 후 인천 기상대로 부르다가 1939년 7월 조선중앙기상대로 명칭을 바꿉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표 기상대로서, 매일 국내 전역의 기상관측과 세계 각지의 기상정보도 수신하여 분석한 후 일기예보를 했습니다. 1948년 서울에 중앙관상대가 세워 지면서 인천 기상대는 인천지역의 기상만 관측하게 되지만, 6‧25 전쟁 때 서울 중앙관상대가 파괴되자 다시 인천 기상대가 잠시 그 업무를 담당했다가 서울 중앙기상대가 복구 되면서 인천 지역을 관측하는 지금의 인천 기상대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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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글로벌이코노믹

한편, 지금이야 일기예보는 신문, 방송, 인터넷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라도 알 수 있지만 초기에는 전신이나 전화가 있던 몇 곳을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이 날씨나 해상 상태를 알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바다 날씨에 민감한 뱃사람들에겐 일기예보가 더없이 절박했습니다. 그래서 날씨 예보를 전달하는 기초적인 수단으로 큰 깃발을 기상대 꼭대기에 걸어 올려 깃발의 모양과 색깔로 그날의 일기를 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응봉산은 바다에서 빤히 보이고 그 정상에 기상대도 한 눈에 들어왔으며, 더욱이 기상대 옥상에서 펄럭이는 풍기대 꼭대기의 대형 깃발은 인천 외곽에서 조차 식별이 가능했다 합니다.
삼각형 깃발은 바람을 나타내는데, 바탕색깔로는 동풍이 녹색·서풍은 청색·남풍은 적색·북풍은 흰색이었으며, 날씨 알림은 사각형 깃발에 흰색은 맑음·적색은 흐림·청색은 비 그리고 눈이 예상되면 녹색으로 표시해서 깃대에 매달았습니다. 밤에는 깃발 대신 큰 전등불을 색깔별로 표시해서 해상 날씨를 알려주었답니다.

1928년에 와서 비로소 전파를 통해 기상예보가 시작됩니다. 이때부터 라디오를 통해 기상 실황 정규 방송을 들을 수 있었으며, 어민을 위한 해상 날씨에 관한 어업 기상방송도 뒤 이은 1931년에 전파를 탔습니다.

날씨에 웃고 날씨에 우는 그래서 서민들의 희노애락을 함께하던 인천기상대에는 남다른 에피소드가 많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한때 기상예보와 더불어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역할도 겸했습니다. 1908년 11월 9일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인천일인거류민단'에서 인천관측소에 시보를 부탁합니다. 그러자 기상대에서는 여러 궁리 끝에 응봉산 허리에 대포를 갖다 놓고, 매일 정오를 알리는 공포탄을 쏘았습니다. 이때부터 응봉산을 오포산(午砲山)이라고도 불렀는데, 오포란 '정오에 대포를 쏜다.'는 의미로, 시계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대포 소리를 듣고 낮 12시를 알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시행 첫 날 대포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놀라서 사방팔방 달아났고, 사전에 이 사실을 알던 일부 사람들조차 땅 바닥에 엎디는 모습에 서로 박장대소 하였다고 전합니다. 대포를 쏘아 정오를 알리던 기상대 시보는 매우 신뢰가 높았으나, 포신이 자주 고장을 일으켜 시각을 어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취급을 잘못하여 화약이 터지면서 큰 인사사고로 이어지자, 1924년 대포를 없애고 대신에 홍예문 꼭대기의 소방서에서 사이렌을 울려 정오를 알렸습니다. 사이렌으로 시보를 알리던 것은 1960년대 초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100여년이란 그리 긴 시간도 아니지만 기상청은 응당 우리 곁에 있는 것으로 그래서 어쩌다가 일기 예보라도 빗나가면 불만을 터트리는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기상이라는 것은 여전히 예측하기가 까다로운 것으로 정평 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 전의 기상 자료가 축적되어 오늘날에는 적중률이 98%에 이른다니 대포를 쏘던 인천 기상청의 감회가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