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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민의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공자·소크라테스·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교집합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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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민의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공자·소크라테스·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교집합을 찾아서

(28) 신들이 싸우는 이유 - 소크라테스

강정민(변호사·소설가)
강정민(변호사·소설가)
플라톤의 저서 「에우튀프론」은 소크라테스가 아버지를 살인죄로 고소한 청년 에우튀프론과 경건에 대하여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에우튀프론은 자기 아버지가 자기집 노예를 죽였다고 관아(官衙)에 고소(告訴)하고 나오는 길이었고, 소크라테스는 불경건의 죄로 멜레토스에게 고소를 당하여 출두하는 길이었습니다.

에우튀프론은 아무리 아버지라도 사람을 죽였으니 처벌을받는 것이 당연한데, 아버지와 친척들은 아버지를 고소하는 것이 불경건한 일이라며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두 사람 사이에 경건과 불경건에 대한 토론이 시작됩니다.
토론 중에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에게 “신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선과 악에 관해서 신들의 생각이 서로 다를 때 싸움이 일어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동일한 것을 어떤 신들은 옳다고 보고 다른 어떤 신들은 옳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서로 다투고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인가?”라고 묻고 에우튀프론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그렇다면 자네가 지금 자네 아버지를 고소함으로써 제우스를 기쁘게 하나 크로노스나 우라노스에게는 못마땅한 일을 하고 있거나 헤파이스토스는 좋아하나 헤라는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 아닌가?”하고 반문합니다.

대화는 계속되고 “모든 신이 미워하는 것은 불경건이고 모든 신이 사랑하는 것은 경건”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경건한 것은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인가? 아니면 신들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가?”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결론은 당연히 “경건한 것은 경건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지 사랑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이 아니다.”로 맺어집니다.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지 사랑받기 때문에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에우튀프론」에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신들이 싸우는 이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탁견(卓見)이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정말 많이 싸웁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선악(善惡), 옳고 그름에 관한 결론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분쟁의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각자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신이 내린 결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자신과 다른 결론을 가진 사람을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 왔습니다. 선악에 대한 문제만큼은 절대 물러설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이유는 이러한 혜안(慧眼)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각자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선악에 대한 결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싸우게 된다는 현상학적인 단면을 정확하게 밝혀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신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이고, 모든 신이 미워하는 것이 불경건이라고 말했는데, 모든 신이 사랑하는 경건이 바로 진리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진리를 찾아 나선 사람입니다.
원죄(原罪)는 세상의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이므로 원죄에서 벗어나면 절대 자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선악을 각자 스스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과연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 방법은 내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되 한 치의 오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누군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제3자가 대신 선악을 판단하고 나는 그의 판단에 절대 복종하는 방법입니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는 첫 번째 방법을, 예수는 두 번째 방법을 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법을 찾고 있습니까? 강정민(변호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