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포(典當鋪)의 전당은 한자 뜻 그대로 ‘물건을 맡기고 얼마간의 돈을 빌리는 행위’입니다. 이 의미를 좀 더 확대하면 ‘무엇인가를 맡기고 필요로 하는 다른 무엇을 얻는 행위’가 되지요. 가령 춘궁기에 호랑이 가죽을 맡기고 쌀을 빌려간 후, 추수기에 빌려간 쌀과 이자로 정한 쌀을 더 보태서 갚고 나서 호랑이 가죽을 되돌려 받으면 이 역시 전당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 같은 물물 교환 방식의 전당은 화폐가 통용되지 않는 곳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경우이고, 통상 전당포에서의 빌리는 주체는 ‘돈’이었습니다. 따라서 화폐가 통용되던 시기에는 전당업도 발전합니다. 고조선 ‘8조금법’ 중 하나인 「도둑질한 사람은 노비로 삼고, 돈으로 대신하려면 50만전을 내야한다」는 내용을 통해 이미 화폐가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아울러 전당 행위도 존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전당포의 개념이 분명하게 나타난 기록으로,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권주’가 있습니다. 이 시조는 너무도 유명하여 지금도 애주가 사이에 칭송되는데, 전문 중 끝 부분에 나오는 「典錢將用買酒喫(전전장용매주끽)」은 우리말로 풀어보면 ‘전당포에 돈을 빌려 술을 사서 마셔나 버리자꾸나.’이지요. 백거이가 당시 전당포에 무엇을 맡기고 돈을 빌렸을까 자못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화폐가 활발히 통용된 시기는 고려 때 입니다. 최초 화폐인 건원중보도 고려 산물이지요. 따라서 당연히 전당포에 관한 기록이 다수 있었을법한데, 유감스럽게도 고려 말 공민왕이 설치한 ‘해전고’ 내용이 전부입니다. 해전고는 본래 궁중에서 사용되는 직물과 가죽제품을 관장하던 창고였습니다만, 공민왕 때 노국공주의 명복을 비는 불사전 자금마련을 위해 일시적으로 전당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국가가 운영한 관설 전당포였던 셈이지요.
조선시대에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중농억상’ 정책으로, 중기까지 교환수단인 화폐의 기능이 약화되고 더불어 돈으로 거래되던 전당업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이 시기에는 무명베(면포)가 화폐의 기능을 대신 하였습니다. 하지만 무명베를 주고받는 전당 행위는 늘 보관과 운반의 불편함이 따랐는데, 설상가상 전쟁과 잇따른 가뭄으로 인해 경제가 악화되면서 그동안의 무명베 전당포조차 하나 둘 사라지고 대신 현물이 오가는 물물교환 장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최근 북한경제가 갈수록 침체되면서 곳곳에 장마당이 서는 이유도 같은 연장선이겠습니다.
물물교환 장터인 ‘장시’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날짜를 정해 펼쳐지는 시장입니다. 이 장시를 통해 생필품의 임시변통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전당의 특징인 신속성을 따를 수 없었고, 교환할 물건은커녕 당장 먹고살기 막막한 사람들은 장시도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해서 가난한 이들은 마을 부잣집 주인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 밖에 없는 이들은 주인에게 일정한 노동을 담보로 하고 생필품을 충족하는데, 이 과정에서 아예 머슴으로 전락하거나, 음흉한 주인에게 아내나 딸을 빼앗기는 부작용도 허다했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상공업이 살아나고 ‘상평통보’가 어느 정도 교환수단으로 자리를 잡자 전당포도 하나 둘씩 늘어났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지은 「광문자전」 속에 ‘이때 돈놀이하는 자들이 대체로 머리꽂이, 옥 비취, 의복, 가재도구 및 가옥·전장(田庄)·노복 등의 문서를 저당잡고서 본값의 십 분의 삼이나 십 분의 오를 쳐서 돈을 내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광문이 빚보증을 서 주는 경우에는 담보를 따지지 아니하고 천금(千金)이라도 당장에 내주곤 하였다.’란 내용에서 당시 전당업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업으로 하진 않더라도 개인 간의 전당행위도 당시의 소송 문건에 자주 등장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고문서 집성 3』 에 ‘선박 주인 이춘성이 47냥 6전을 윤씨에게 빌려 쓰면서 배를 전당하는데, 12월 20일까지 상환하지 못할 경우 배의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기록을 통해서 개인 간 전당문서가 오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항 후 일본은 자신들의 은행을 조선에 개설하여 상업 자본을 통해 국내 경제를 장악하려 했고, 근대적 토지제도를 마련해 준다는 구실로 상당량의 토지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당포 특히 ‘질옥 전당포’는 토지나 가옥을 저당물로 받거나 헐값에 사들여 조선에 정착하려는 일본인에게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러일 전쟁 후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할 당시 이미 일본인들은 각 개항지는 물론 남촌을 비롯한 서울 곳곳에 그들의 정착촌을 늘여 가는데 그 선두에 전당포가 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을 치른 가난한 1960~70년대, 전당포는 다시 우리 삶 깊숙이 자리합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민초들에게도 경조사는 있기 마련이고 주당들의 허세도, 명절의 세뱃돈도, 아이들의 입학과 졸업 선물도 필요했습니다. 그럴 때 모처럼 장만한 진공라디오, 양복, 결혼 패물을 들고 전당포 철창 앞에 섰습니다. 전당포 주인이 돋보기안경 너머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때 그저 죄인 된 양 눈길을 피하곤 하였지요. 몇 푼 손에 쥐고 나올 때 저당물은 이미 내 것이 아닐 것이라는 섭섭함이 있지만, 가져가는 소고기 한 근에 싱글벙글 하는 아이들의 환한 웃음을 떠 올리며 발길을 재촉하던 추억도 당시의 전당포와 함께 남아 있습니다.
80~90년대 경제가 나아지고 신용카드가 정착되며 전당포는 사양길로 접어들었지만, 요사이 다시 등장한다니 격세지감이 들어 살펴본 전당포 이력이었습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