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은 40세를 이르는 말로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공자가 40세에 이르러 직접 체험한 것으로,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언급된 내용이다.
일단 외형상으로는 총수에 오르기까지 구 회장은 후계자 코스를 밟아왔다. 하지만 엄격히 구분하면 스스로 선택한 길이 없다. 일방적인 후계자 수업을 받은 셈이다. 양자입적을 시작으로 LG 입사, 초고속 승진까지 본인 스스로 내린 결정보다는 고 구본무 회장을 비롯한 LG家의 결정에 따른 과정으로 해석된다.
지난달 29일은 구 회장 40년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이었다. 한쪽 길 입구에는 ‘사장→부회장→회장’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서 있었고, 다른 편 길에는 ‘회장’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었다. 중간 경유지를 거치는 코스는 정상까지의 거리가 좀 먼 반면에 지름길은 가파르긴 하지만 거리가 짧다.
구 회장은 곧바로 총수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불혹에 걸맞은 결정으로 보인다.
그가 LG 총수에 오른 것이 자연스러운 후계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당사자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억지로 시킬 수 없다"는 의미로 흔히 쓰는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측면에서의 해석이다.
그렇지만 재계에서는 그의 경영능력에 대해서는 다소 의심하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13년 동안의 혹독한 후계자 수업과 이렇다 할 경험도 없이 거대 LG를 경영하겠다고 나선 자신감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깊고도 크기 때문이다.
당장 휴대전화·디스플레이 등 주력 계열사의 부진과 1조원에 달하는 거액의 상속세 문제 등이 우선 해결과제로 지목된다. 여기에 미래 성장동력을 모색하는 동시에 연말 인사에 앞서 조직·인사 개편을 준비하는 등 LG그룹 도약을 위한 진용 구축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가지 않은 길’에 그가 어떤 발자취를 남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앞으로 선택한 길 굽이굽이에는 그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프로스트의 시처럼 그가 먼 훗날 ‘한숨지으며, 두 갈래 길에서의 선택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고 아쉬움과 미련을 표시하는 일이 없기를 빈다. 그의 아버지 고 구본무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