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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분석]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 세계 최대 영화기업… 자전거팔아 시드머니, 발성영화로 할리우드 제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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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분석]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 세계 최대 영화기업… 자전거팔아 시드머니, 발성영화로 할리우드 제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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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분석]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 세계 최대 영화기업… 자전거팔아 시드머니, 발성영화로 할리우드 제패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 김대호 소장 / 경제학 박사]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는 미국의 영화제작 회사이다.

워너 브라더스 픽처스(Warner Bros. Pictures, Inc.) 라는 이름을 알려져 있기도 하다.
영화를 제작할 뿐 만 아니라 배급을 주로 한다.

TV 프로그램 제작과 음악 사업을 하고있다.

워너미디어 그룹에 속해있는 미디어 &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볼 수 있다.

본사는 캘리포니아 주 버뱅크에 위치해있다.

미국영화협회에 가입한 할리우드 메이저 6대 스튜디오중 하나이다.

1918년 4명의 워너 형제인 잭 워너, 해리 워너, 앨버트 워너, 샘 워너는 '워너 브라더스, 웨스트 코스트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1925년에 와서 워너 브라더스 픽처스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해 바이오그래프를 인수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주목받지 못하던 기술인 발성 영화 개발에 나섰다.

1926년 음악이 들어간 돈 주앙을 개발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27년 마침내 최초의 발성 영화인 재즈 싱어를 개발해 냈다.

재즈 싱어의 개봉은 워너브라더스를 단숨에 메이저 스튜디오로 올려 놓았다.

이 영화 회사는 워너(Warner) 성을 가진 형제들이 세웠다. 아버지는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한 유대인이다. 직업은 구두 수선업자였다. 1983년 유대인차별에 반발하여 신대륙이던 미국으로 건너갔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메릴랜드 주의 벌티모어 였다. 수입이 신통치 않자 모피사업을 한다며 친구 따라 캐나다로 넘어갔다. 2년 동안 고생만 잔뜩 하다가 돌아왔다. 1896년 오하이호 주로 이사했다. .

그에게는 모두 11명의 자식이 있었다. 맏이인 해리가 1899년 자전거 가게를 열었다. 그러던 중 손아래 동생들이던 앨버트와 새뮤얼이 활동사진을 들고 오하이오와 펜실바니아의 장터를 돌아다니며 상영해주고 돈을 받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작품의 이름이 ‘위대한 철도도둑’이다. 도중에 영사기가 고장 나 아버지의 금시계와 타고 다니던 말을 전당포에 맡긴 일화는 영화역사의 한 페이지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장래성이 있다고 본 해리는 동생들과 합작을 하기에 이른다. 자전거가게를 몽땅 팔아 그 돈으로 펜실바니아주의 뉴캐슬이란 지역에 자그마한 빌딩을 샀다. 그리고는 영화관으로 개조해 활동사진을 돌리기 시작했다. 1905년의 일이다. 바로 이때가 워너 브러더스 영화사의 창립기원이다.

사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자기네들끼리만 필름을 나누는 MPPC라는 트러스트의 횡포에 밀려 영화를 더 이상 돌릴 수가 없었다. 4형제는 결국 1910년 영화사업을 접었다. 그로부터 2년 후 1912년에 기회가 왔다. 미국정부가 반독점법을 만들어 필름독점을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다시 출발한 워너 4형제는 영화제작에 나섰다. ‘포장마차’와 ‘멕시코 국경의 불법자들“이라는 영화를 보급했다. 그러나 실패였다. 고리타분한 주제 탓인지 관객이 몰려들지 않았다. 자금부족으로 다시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전쟁영화에 운명을 걸었다. 독일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한 제임스 제라드의 작품인 ’4년간의 독일생활‘을 주제로 영화로 만들었다. 당시 미국과 독일은 앙숙이었다. 그 독일의 실상을 고발하는 영화였다. 흥행은 대박이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차대전 참전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이 영화다. 이 영화로 워너 브러더스는 일약 세계적인 영화사로 부상했다. 그때가 1917년이었다.

1927년에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소리 나는 발성영화인 ‘재즈 싱어’를 내놓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영화는 활동사진을 성우가 옆에서 설명해주는 식이었다. 이를 오늘날의 발성영화로 승화시킨 주역이 바로 워너이다. 그 해 워너의 주가는 주당 3달러에서 132달러까지 치솟았다. 재즈싱어 히트이후 10년만인 1937년 워너는 100개의 영화배급사와 675개의 영화관 그리고 80개의 촬영소를 거느리는 거대 영화재벌로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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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분석]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 세계 최대 영화기업… 자전거팔아 시드머니, 발성영화로 할리우드 제패


그 찬란한 역사의 중심에는 워너 4형제가 있었다. 그 4명의 형제들은 각자 특성이 있었다. 맏인 해리는 사업수완이 뛰어났다. 새뮤엘은 기계 만지는 기술이 탁월했다. 영사기가 고장 날 때마다 그가 고쳤다. 앨버트는 수자개념에 밝았다. 경리회계는 그의 몫이었다. 잭은 영화를 보는 예술적 눈이 뛰어났다. 서로 그 장점들을 조화시키면서 세계 최고의 영화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우의는 평생 이어지지는 못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서로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져갔다. 특히 사업 위주의 해리와 작품 위주의 잭 간에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여자문제를 놓고 서로 싸우기도 했다. 1940년대 들어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영화산업은 일대 위기를 맞는다. 그 위기에 대처하는 방안을 놓고도 형제들의 의견은 갈라졌다. 후계구도를 두고 서로 하겠다면서 난장판이 벌어졌다. 결국 회사를 모두 팔아 각자 돈을 나눠 갖기로 한다. 어느 누구도 회사에 잔류하지 않기로 했다. 잭이 그 약속을 어기고 이면계약을 통해 다시 슬그머니 복귀했다.

그 바람에 형제들의 의는 더욱 갈라졌다. 형과 동생이 죽어도 서로 장례식조차 오가지 않을 정도로 갈라졌다. 새 지배구조 속에서 잭도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워너 형제들의 역사는 여기까지였다.

워너 브러더스는 워너 형제가 아니 전혀 다른 사람의 손에서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된다.


김대호 소장 /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