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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뿌리칠 수 없는 매혹-물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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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뿌리칠 수 없는 매혹-물매화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찬바람에 떨고 있는 꽃들이 소슬하다. 먼 산 단풍에 눈길을 주는 사이 뜨락의 꽃들이 시들고 있다. 우리가 꽃의 아름다움을 완상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이 베푸는 일종의 보너스와도 같다. 사바나 가설(savanna hypothesis)에 따르면, 꽃은 자신이 지닌 풍부한 생존 자원을 드러내는 일종의 시그널이라고 한다. 결국 꽃의 아름다움은 자신을 알아보는 눈을 지닌 곤충을 유혹하기 위함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인류는 특정한 공간과 사물을 선호하도록 진화했다고 한다. 꽃이 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열매가 맺히고, 그 주변에는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한 초식동물이 어슬렁거리게 마련이다. 우리의 뇌는 이런 자연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환호하도록 진화해 왔다. 인간에게 적록색맹이 드문 것도 초록의 수풀 속에서 잘 익은 열매를 구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우리가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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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매화

더 늦기 전에 가을의 진객인 산구절초, 투구꽃, 칼잎 용담 같은 꽃들을 찾아 높은 산에 오르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 파란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물가에 함초롬히 피어 있는 물매화도 그 중의 하나다. 매화는 사군자 중 하나로 이른 봄 눈 속에 피는 꽃인데 이 가을에 무슨 매화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물매화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나무에 피는 매화가 아니다.

물매화는 범의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로 여름과 가을 사이에 꽃을 피운다. 잎 사이로 여러 대의 꽃줄기가 올라와 꽃을 피우는데 기껏해야 10~20㎝ 정도여서 꽃과 눈 맞춤을 하려면 몸을 낮추어야만 한다. 가녀린 줄기 끝에 한 송이씩 피어 있는 물매화의 청초한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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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매화

아주 먼 옛날 옥황상제의 정원을 지키는 선녀가 있었는데, 어느 날 황소가 나타나 정원을 망가뜨렸다. 이를 막지 못한 선녀는 옥황상제의 진노를 사 하늘나라에서 쫓겨나 이 별 저 별을 떠돌다 그만 발을 헛디뎌 인간 세계로 떨어져 꽃으로 피어난 것이 물매화란 이야기가 전해온다.

물매화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다섯 장의 흰 꽃잎과 수술이 많이 달린 꽃 모양이 매화를 빼닮았다. 거기에 습지나 물가에서 잘 자라는 생태적인 특징을 생각하면 물매화로 불리는 게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물매화는 나무가 아닌 풀이어서 한자로는 매화초(梅花草), 우리말로 ‘풀매화’라고도 부른다.

이 사랑스러운 꽃송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가지의 수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매화의 수술은 모두 10개인데 꽃밥이 튼실하게 달리는 수술 5개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5개의 헛수술을 지니고 있다. 진짜 수술과 교대로 배치된 헛수술은 여러 개로 갈라지고, 갈라진 끝엔 물방울 모양의 가짜 꿀샘이 있어 이슬처럼 반짝이며 물매화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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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매화

화분을 생산하는 진짜 수술보다 헛수술이 더 예쁘고 화려한 것은 수분을 도와줄 매개 곤충을 효과적으로 유혹하기 위한 꽃의 전략이다. 물매화가 피는 시기가 곤충의 활동이 뜸해지는 가을인데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흰색의 꽃을 피우다 보니 헛수술을 이용하여 꽃가루받이를 하기 위한 것이다.

물매화 중에서도 이른바 ‘립스틱 물매화’ 또는 ‘연지 물매화’는 야생화 동호인들에게 사랑받는 꽃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까닭은 보통의 물매화의 꽃밥이 연한 미색인데 반해 5개의 수술 끝에 달린 꽃밥이 붉은 립스틱을 바른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가을산을 오르다 물가에서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물매화의 자태는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작품이다. 물매화의 꽃말은 고결, 결백이다. 물매화를 만나지 않고 가을을 보내는 일처럼 슬픈 일도 없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