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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한겨울 눈을 이고 선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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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한겨울 눈을 이고 선 동백꽃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한겨울 하얗게 눈을 이고 선 동백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리다. 한겨울 맵찬 바닷바람에 시달리면서도 진록의 이파리 사이사이로 선혈처럼 붉은 꽃을 가득 달고 선 동백나무를 만나던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어린 시절, 동백은 내겐 상상 속에서 피던 꽃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보았던 바다처럼 머릿속으로만 그려보다가 처음 동백을 보았던 것은 성인이 된 뒤였다. 38선이 가까운 한수 이북에서 자란 탓에 주로 중부 이남의 바닷가에서 자라는 동백을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백은 차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소교목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 등에 자생하는 나무로 키는 약 15m까지 자라고 잎 표면은 광택이 나는 짙은 녹색이고 꽃은 암술과 수술이 같이 있는 1월에서 5월 사이에 핀다. 꽃색은 주로 붉은 색이지만 거문도 등 남쪽의 섬에는 흰 동백도 있다. 동백(冬柏)이란 이름은 겨울에 꽃이 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고 중국에서는 해홍화(海弘花)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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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내게 제일 먼저 동백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였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자의 노래를 들으며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든' 동백꽃을 홀로 그리다 보면 어린 가슴에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백의 빨간 핏물이 드는 것만 같았다. 이미자의 노래 속에서 수없이 동백이 피고지는 동안 어느새 나는 어른이 되었고 살이에 부대끼느라 가슴 속 동백꽃의 붉은 빛은 점점 흐려져 갔다.

"동백꽃 보러 안 오실래요?"

남녘에서 부쳐 온 그녀의 편지 속에선 붉은 동백꽃이 흐득흐득 지고 있었다. 선혈처럼 낭자하게 떨어져 내린 동백꽃을 행여 밟을세라 조심조심 오동도 동백숲을 빠져나와 부쳤다는 그녀의 편지 속엔 그리움인 양 선홍의 동백꽃잎이 동백열차의 기차표처럼 들어 있었다. 그 밤으로 여수행 밤기차를 타고 가던 내내 동백꽃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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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짭쪼름한 바다내음과 수평선에 걸려 있던 몇 척의 고깃배, 시누대를 끝없이 흔들던 매운 해풍과 페르시아 카펫처럼 길을 덮고 있는 붉은 꽃송이들이 낭자한 동백숲을 걸으며 그녀가 팔짱을 끼었을 때 훅 하고 스치던 여인의 향기, 머리 위를 오가던 갈매기의 울음소리와 하얗게 바다를 가르며 섬 뒤로 잽싸게 사라지던 모터 보트의 힘찬 굉음조차 붉은 동백꽃으로 내 가슴에 피어나던 날이었다.

눈 속에 피는 꽃 중에 복수초나 매화가 있긴 하지만 그 꽃들은 봄을 알리는 꽃인데 반해 개화시기가 1~5월인 동백꽃이야말로 겨울에 피어나는 참겨울꽃이라 할 수 있다. 동백꽃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드문 조매화(鳥媒花)다. 벌이나 나비, 바람이 아닌 동박새가 꽃가루받이를 도와준다. 동백꽃이 피는 곳에 가면 어렵지 않게 연록의 빛깔 고운 동박새를 만날 수 있다. 동박새는 몸길이가 11㎝ 정도되는 아주 작은 새로 눈가에 흰 테두리 무늬를 한 귀여운 새로, 동작이 잽싸고 부지런히 동백나뭇가지를 옮겨 앉으며 동백꽃을 쪼아대는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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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동박새는 동백꽃의 꿀을 먹는 대신 꽃가루를 묻혀 다른 꽃으로 옮겨줌으로써 동백의 수분을 돕는다. 바로 이 동박새가 있으므로 동백은 곤충이 없는 한겨울에도 마음 놓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동백이 한겨울에 꽃을 피우는 이유는 동박새 외에도 또 있다. 겨울에는 거의 모든 식물들이 휴면상태에 있기 때문에 햇볕과 땅의 수분을 거의 독차지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병해충까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백꽃이 작은 동박새를 믿고 한겨울에도 동백꽃이 당당하게 피어나듯 세상의 찬바람이 아무리 춥고 매워도 우리가 누군가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면 그 작은 신뢰가 꽃을 피게 하여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