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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꽃보다 열매가 더 아름다운 낙상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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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꽃보다 열매가 더 아름다운 낙상홍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지난 연말, 고교 동창들과 겨울바다를 보러 속초여행을 갔었다. 속초항에서 싱싱한 회로 점심식사를 하며 한바탕 이야기꽃을 피운 뒤 양양 낙산사를 찾았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다녀온 곳이라 옛 추억을 더듬어볼 요량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낙산사 일주문을 막 들어섰을 때였다.

한 친구가 길섶에 선홍빛 열매를 달고 선 나무를 가리키며 이름을 물었다. 나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기억이 날 듯 하면서도 나지 않아 가지마다 홍보석처럼 빨간 열매를 달고 선 나무를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피라칸타, 백량금, 남천…. 순간적으로 붉은 열매를 내어다는 나무 이름 몇 가지를 떠올려 보았지만 내가 떠올린 이름 속에 그 나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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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상홍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고 했다. 십 수 년을 꽃만 보고 살아왔다 자부하던 내게 아직도 모르는 나무가 있다는 게 부끄러웠다. 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지금은 꽃이 없는 계절이라서, 꽃 진 뒤에 맺힌 열매라서 알 수 없다고 핑계를 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에 와 식물도감을 펼치고서야 그 붉은 열매를 달고 선 나무가 낙상홍이란 걸 알았다. 낙상홍(落霜紅)! 서리가 내린 뒤에도 붉은 열매를 달고 선 나무라는 뜻이다. 낙상홍은 한 여름에 자색의 꽃을 피우는데 눈이 내리는 한 겨울에도 붉은 열매를 달고 있어 꽃보다 열매로 더 많은 사랑을 받는 나무 중에 하나다. 순백의 눈 위에 선홍빛 열매는 멀리서도 눈에 확 띄며 단번에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확연히 드러내 보이는 것은 보다 빨리 새들의 눈에 띄어 먹이가 되어주고자 함이다. 물론 새들이 먹은 뒤에 자신의 씨앗을 보다 멀리 퍼뜨려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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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상홍

낙상홍은 감탕나무과에 속하는 일본 원산의 소교목으로 열매가 아름다워 조경수로 들여왔는데 환경을 탓하지 않고 어디에서나 잘 자라고 공해에도 강하여 공기정화 기능을 담당하도록 공단이나 도로변 같은 공기 오염이 심한 곳에 많이 심는 나무다. 녹음이 짙어지는 여름엔 평범해 보이는 나무군락이지만 가을이 되어 서서히 붉은 열매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뒤에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는 겨울까지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찬 계절에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낙상홍의 열매는 붉은 구슬모양으로 지름이 5㎜ 정도로 작지만 다닥다닥 달린 열매들이 한데 어우러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고, 다른 열매와는 달리 한 겨울에도 얼지 않아 'winter berry'라 불리며 새들의 좋은 겨울양식이 되어준다. 그런 까닭에 겨울이면 낙상홍 주변에는 많은 새들이 모여들고 새들의 지저귐이 끊이지 않아 얼어붙은 겨울 정원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새들이 먹은 낙상홍의 씨앗은 소화가 되지 않고 새들의 이동에 따라 먼 곳으로 옮겨져 나무의 새로운 생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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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상홍

우리나라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일본 원산의 낙상홍 외에도 품종개량을 한 미국 낙상홍이 있다. 얼핏 보기엔 비슷하지만 미국 낙상홍이 잎과 열매가 조금 크다. 또한 일본 낙상홍은 붉은 자색의 꽃이 피지만 미국 낙상홍 중엔 흰 꽃이 피기도 한다. 열매도 미국 낙상홍이 더 크고 더 많이 탐스럽게 달린다. 눈이 내린 겨울날의 낙상홍의 열매는 새들의 귀한 양식이 되고 눈의 흰색과 대비되어 더욱 빛난다. 겨울 정원의 멋을 더해주는 낙상홍의 붉은 열매처럼 이 추운 계절을 견디게 해 줄 멋진 사람이 곁에 있다면 살을 에는 한파도,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미세먼지도 거뜬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