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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기다림의 미학, 옴니버스적 고찰…장혜주 안무의 '정류장,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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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기다림의 미학, 옴니버스적 고찰…장혜주 안무의 '정류장,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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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계절이 도시의 모퉁이를 엄습하면/ 관자볼 아래까지 차 있던 그리움이 스물 스물 새어 나온다/ 빨간 전화통과 함께 남겨진 우울/ 저만치 쓸쓸함을 안은 우체통과 조우한다/ 일상에 묻혀 놓쳐 버린 여름날들/ 내 가슴은 여린 이슬비로 울고 있었다/ 도회에는 또 일요일 오후 같은 쓸쓸함이 번져온다/ 행선지가 없는 버스를 기다리며/ 나의 봄은 화려할수록 아픔이 차오른다/ 신호등이 ‘그만’이라고 외친다/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가로등 저 편의 밤

3월 29일 오후 8시와 30일 오후 3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예술단체‘LINKART’ 주최, 전문무용수지원센터・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의 기다림에 관한 감각적 몰입을 유도한 장혜주 안무의 현대무용 <정류장,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가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무용, 영화와 만나다.’라는 슬로건으로 관객들이 ‘기다림’을 두고 자기고찰에 빠지게 만들며, 극 중 연희자들과 관객들이 일상의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를 공감하고,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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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장혜주가 현대무용을 접근하는 방식의 한 편에는 한국적 서정이 듬뿍 자리 잡고 있다. 전개 방식도 혼자 해결식이 아닌 공동체적인 표현 기법이 두드러진다. 이미지적으로 처음에는 차갑게 느껴지지만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로 인하여 이내 훈훈해지며 예술적 가치와 관객의 호의적 반응을 창출한다. 장혜주의 예술적 문화유전자는 수리적 내공의 학습시대에서 서정의 청년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기다림’을 화두로 두고 그녀가 몸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아픔만큼 성숙한다는 것이다.

기다림은 ‘때’와 ‘대상’을 아우른다. 인생의 목표가 되기도 하고 욕구 충족의 감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정류장의 피사체가 되는 ‘공중전화 부스’, ‘우체통’, ‘신호등’, ‘가로등과 벤치’라는 네 가지 오브제를 통해 펼쳐진다. 오픈형 무대 디자인,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을 ‘기다림’의 관점에서 포착해낼 수 있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갈래가 다른 예술가들과의 유기적만남, 빛을 이용한 조명 연출, 장면 전환에 연계된 영상 변화를 직접적이고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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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는 프롤로그, 01. 우체통_ 느려지는 시간 02. 공중전화_ 기다리다, 기다리게 하다 03. 신호등_ 기다림 속의 기다림 04-1. 영화_ 5년, 5분 04-2. 벤치_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차별되는 특징은 춤의 인서트로써 사랑에 미숙한 남자와 여인의 기다림에 걸친 투박하지만 아리게 자리 잡고 있는 단편 흑백영화이다. 현상학적 모습에 감성적 이미지를 더한 공연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기다린다고 해서 멈춰있는 것은 아니다. ‘기다림은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지탱하게도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슬픔을 억누르며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야하는 사람, 세상의 근심걱정을 다 떠안고 살아가는 사람, 앞날에 대한 기대감에 설렘으로 사는 사람, 상처받고 치유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 등이 있다. 상황에 따른 기다림이 주는 다양한 감정(슬픔, 초조, 희망, 좌절, 기대, 실망, 설렘 등)들을 성격에서 기인하는 특징적 이미지를 움직임으로 치환한다.
서(序), 융단의 촉감이 차단된 차가운 도시의 일면을 닮은 하얀 플로어, 주변 소리를 담은 인트로 사운드와 객석까지 밝게 켜진 조명은 한낮의 광장에 와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연장에 입장한 관객들은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앉아 오브제에 대한 각자의 느낌으로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연극배우(남수현)가 등장하고, 기다림 끝에 그가 ‘지친다고. 알 수 없는 기다림이 지치게 한다.’고 주제적 운을 뗀다. 이어질 사연들은 낭만적 서사임이 분명하다.

01. 우체통의 금속 소리와 같은 사운드를 시작으로 한 남자(황찬용)에게 조명이 집중된다. 바닥의 사각 영상은 바람소리와 함께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구겨진 편지지 같은 느낌으로 바뀐다. 남자가 한참을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우체통 앞에 선다. 보내기 싫은 편지를 보내야만 하는 듯한 복잡 미묘한 심정의 남자는 우체통과 함께 무대 외곽을 돌며 송곳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마음과 머리가 갈등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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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톱니바퀴, 오토바이를 연상시키는 소리와 어우러진 영상, 바닥과 호리존트의 사각 영상과 무대 위의 오브제가 만들어내는 조명과의 조화는 빛・소리・움직임의 삼요소가 어우러져 송신자인 남자의 심정, 슬픈 기다림이 연출하는 시간의 흐름, 편지가 수신된 이후의 상황까지 연상하게 한다. 우체통은 계절과 시간을 오가며 공연이 진행되면서 무대의 한 바퀴를 돈다.

02. 연락처를 외우지 않아도 핸드폰이 대신해주는 세상에 공중전화를 애타게 찾는 여인(장혜주)은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기에 전화번호를 다 외우며 절박한 기다림을 반복하고 있을까? 연락을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애타게 연락을 취하는 정면, 전화 연결이 닿지 않을 때의 표정, 차례를 기다릴 때마다 순간순간 바뀌어가는 감정들이 춤 연기로 표현된다.

공중전화에서의 기다림이 주는 감정들(간절함, 초조감, 안도, 걱정, 불안, 답답함, 궁금증, 짜증)은 변화무쌍하다. 이 장(場)에서 들리는 소리와 무용수들(오윤형, 임소정 가세)의 움직임은 다양한 감정들을 가시화시키고, 가시화된 감정들은 바닥에서 바뀌어가는 기하학적인 영상에서도 발견된다. 마치 전화를 걸어 전해야 할 메시지를 대신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03. 빨간불・노란불・초록불, 신호등에서 초록불은 전진을 허락한다. 푸른 초원의 평화로운 색이지만, 깜빡거리는 초록불을 보면 그 어느 때 보다도 다급해진다. 빨강은 정지를 뜻하지만, 빨간불에 멈춰 섰을 때 비로소 쉼이 생기면서 지나치던 주변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색깔이 전해주는 기표와 기의가 있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고, 무대가 횡단보도로 바뀐다. 도착지를 향한 기다림 안에서 신호등을 만나 기다림을 거친 무용수들은 각자가 목적한 바에 따라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아간다. 가는 방향과 속도는 모두 다르지만 비트에 몸을 싣고, 기다림 끝에 펼쳐질 희망찬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춤은 노련한 경험의 조각 같은 일체감을 보인다.

빠르고 활기찬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간다. 횡과 종이 교차되는 순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간의 상대성이 느껴진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내일과 빨리 왔으면 하는 내일이 마주한 것 같다. 그들 사이에 다른 질감의 공기가 흐르고 있다. 선택과 집중 사이의 갈등이 섬광처럼 일어난다.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04-1.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사람의 뒷모습을 담은 이별 장면이 단편필름에 담긴다. 각자만의 이별의 경험을 떠올리며 아픔・아쉬움・미련・후회・성숙 등의 이별 후 파생되는 감정을 공유한다. 영상 속의 남녀는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교제했지만, 헤어지는데 소요된 시간은 고작 5분이다. 설명은 없지만 남녀의 표정, 제스쳐, 행동 등의 모든 내러티브가 이별의 순간임을 증거한다. 관객은 롱테이크의 프레임 안의 남녀의 감정과 동일시되는 시간을 공유하며, 원하고 듣고 싶은 상대의 대답이나 행동을 기다리는 답답함, 슬픔, 아쉬움, 내면의 감정 들을 느낀다.

여기에서 영화는 춤추는 모습을 기록용으로 담거나 춤을 소재로 삼은 영화가 아닌, 다른 오브제들처럼 기다림을 말하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영화 속의 남자는 수척하지만 차가울 정도로 무심한 모습이다. 이별 후 돌아서는 여자의 뒷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는 남자의 세상은 흑백영상으로 바뀐다. 여자의 뒷모습이 점이 된 후에야 비로소 남자의 어깨에 진동이 느껴지며 흐느끼기 시작했고, 두 눈에 눈물이 흐르면서 영화적 특징이 드러난다.

04-2. 남자배우가 영화 속의 감정을 그대로 가져와 무대에 등장한다. 영화의 연장선이다. 혼자가 되어버린 것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여자가 돌아 올까봐 못 떠나고 기다리는 것일까?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벤치 주변만이 밝고 나머지는 온통 캄캄하다. 밝은데 있어야 혹시 여자가 돌아왔을 때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한동안 어둠만이 존재할 곳으로 걸어 들어갈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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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적 작업의 소중함에 대한 존중과 움직임의 공감대 형성을 위한 균형 감각은 안무가 장혜주의 미덕이다. 호리존트에 실시간으로 영사되는 여인의 씬은 유일하게 전작 공연 <정류장 ; Encounter>을 차용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표현하는 대상이 달라짐에 따라 음악, 움직임, 무용수의 내적상태도 달라져 있다. 가로등 아래 벤치 주변에서 춤추는 무용수는 사람으로서의 개체도, 헤어진 대상도 아닌 남자배우의 상념이다.

후(後), 호리존트에는 아까 봤던 영상이 흑백영화처럼 되감기고 있다. 각 오브제 앞에 무용수들 역시 되돌아가 자신의 기다림을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되감기된 장면에 맞추어 흐르는 음악은 마지막 벤치 씬의 음악을 거꾸로 돌린 것이다. ‘기다림은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지탱하게도 한다.’ 장혜주는 장고의 양 날개처럼 같게 보이지만 다른 타인의 개성이 성장하기를 기다리면서 자신을 성숙시켜왔다. 그녀의 이번 공연은 동시대 한국 현대무용의 새로운 흐름을 이끄는 커다란 한 축임을 보여주었다.

연출・사진제공/옥상훈


장석용 글로벌이코노믹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