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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칼럼] 슬로푸드와 슬로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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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칼럼] 슬로푸드와 슬로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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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신 가톨릭대 명예교수
얼마 전 슬로푸드의 발상지 이탈리아의 '브라(Bra)'를 찾았다. 브라는 2006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토리노 남쪽의 작은 도시다. 브라에서 머문 숙소는 포도주 양조장 안의 호텔답게, 포도주 한 병을 무료로 제공했고, 객실 창을 열면 눈 덮인 알프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여장을 풀고 나서 슬로푸드 레스토랑을 물었더니, 호텔 지배인은 슬로푸드 본부와 건물을 같이 쓰는 대표적인 슬로푸드 레스토랑을 소개해 주었다. 레스토랑 종업원이 점심메뉴로 추천해준 두 가지 요리 가운데, 하나는 계란 노른자로 반죽했다는 면발이 가는 파스타 요리였고, 또 다른 하나는 송아지 고기를 와인에 담가 4시간 이상 약한 불에 익혔다는 고기요리였다.

슬로푸드 운동의 창시자 카를로 페트리니(Carlo Petrini)가 슬로푸드 선언문 초안을 다듬었다는 역사적 레스토랑에서 먹는 정통 슬로푸드… 귀한 슬로푸드를 '머리'로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으려 애쓰는 나와 달리, 아내의 반응은 빠르고 직설적이었다. "파스타는 불어터진 비빔국수 맛이고, 송아지 고기는 장조림 고기 맛인데?"하면서, 맛난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성이 담긴 음식에 대한 아내의 혹평에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도 익숙하지 않은 맛에 대한 솔직한 느낌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언가 아쉬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레스토랑에 먼저 왔던 다른 손님들은 아직 자리에 앉아 수다를 하고 있었다. "이 낯선 분위기는 뭐지? 우린 나름대로 아주 긴 시간 머물렀는데, 저 손님들은 오늘 휴가인가?" 그런데 레스토랑을 나오자 브라의 광장과 거리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큰 슈퍼마켓만 문을 열었을 뿐,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았다. 심지어 유명한 치즈박물관마저 오후 4시에 다시 연다고 쓰여 있었다. 브라에는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어쩔 수없이 우리도 호텔로 돌아왔다.

오후 4시쯤 호텔을 나와 치즈박물관으로 다시 가면서 '슬로푸드가 뭘까?' 생각해보았다. 슬로푸드는 우선 만드는 시간이 긴 음식을 말한다. 된장, 고추장, 김치와 같은 한식도 전형적인 슬로푸드다. 하지만 슬로푸드는 만드는 시간보다 먹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천천히 먹는 삶은 음식과 대화를 즐기면서 천천히 사는 삶이다. 다시 말해 슬로푸드와 슬로라이프는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윈윈 관계인 것이다. 물론 패스트푸드와 패스트라이프는 정반대의 관계이고….

그러면 어떻게 슬로푸드와 슬로라이프를 실천할 수 있을까? 먹는 것이 사는 것을 위한 수단인 삶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삶을 살면 되지 않을까? 반대로 먹는 것이 사는 것을 위한 수단인 삶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는 사람을 가정해보자. 이른바 '면식'은 먹는 것이 사는 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전형적인인 예가 될 수 있다.

오후 5시쯤 되자 브라의 좁은 길에도 우리처럼 많은 차량이 씽씽 달리고 있었고, 사람들도 우리처럼 빠르게 걷고 있었다. 다행이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시에스타를 마치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그들처럼, 우리도 낮이나 주중엔 바삐 먹고살고, 저녁이나 주말엔 슬로푸드와 슬로라이프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Happy friday to you.' 이것이 시에스타 없는 우리 나름의 슬로푸드이고 슬로라이프 아닐까?


김석신 가톨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