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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칼럼] 성선설과 성악설, 그리고 먹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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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칼럼] 성선설과 성악설, 그리고 먹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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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신 가톨릭대 명예교수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세상은 시간과 공간과 인간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결같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시간도 흐르고 공간도 달라지고 인간도 늘 변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오래된 ‘대한늬우스’를 보면 시간과 공간의 변화는 물론, 사람들의 옷매무새나 헤어스타일도 많이 달라 낯설게 느껴진다. 그런데 유독 잘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는 감당하기 어려운 주제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았고, 욕망과 이익 추구는 본성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으로 생긴 것이므로 이를 억제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았고, 욕망과 이익 추구는 외부의 자극 때문이 아니라 본성에서 생긴 것이므로 예(禮)의 교육과 실천을 통해 이를 통제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한비자는 순자의 예가 법을 이르는 것이라면서 법치를 주장하였다.
먹을거리를 앞에 둔 인간의 본성은 성선설에 가까울까? 아니면 성악설에 가까울까? 생명과 관련지어서 한번 생각해보자. 생명을 지닌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려는 자기 보존(self preservation)의 욕구가 있고,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당연히 자신에게 유익하다. 그래서 우리는 욕구 충족이라는 자기이익(self-interest)을 추구한다. 인간의 삶은 자기이익의 추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먹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보존을 위해 식욕을 충족시켜야 한다. 식욕 충족이 자기이익이므로 식욕 충족의 대상인 먹을거리와 먹을거리를 앞에 둔 인간의 본성 자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중립적이다.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때때로 먹을거리 때문에 비난받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사회적 삶을 선택했고, 부족한 먹을거리를 앞에 두고 경쟁과 협력이라는 시소의 균형점을 찾아야 했다. 우리는 그 균형점에 황금률을 받쳐놓았다. 황금률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황금률의 핵심은 나와 남의 자기이익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기주의는 인간 행위의 동기를 자기이익에 둔다. 심리적 이기주의는 나의 자기이익을 남의 자기이익보다 중요시하는 반면, 윤리적 이기주의는 나와 남의 자기이익을 똑같이 존중하므로 바람직하다.

인간이 모인 국가도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다른 나라에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다른 나라를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지켜야 한다. 최근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문제를 놓고 한국과 일본이 FTA에서 담판을 지었다. 만약 우리나라 핵발전소에서 비슷한 사고가 일어났다면 우리나라 해당지역 수산물을 일본이 사겠는가? 국가의 경우도 ‘내로남불’은 바람직하지 않고, ‘역지사지’로 황금률을 지켜야 한다. 지키지 않으면? 해결방안이 마땅치 않다. 국가를 상대로 도덕 교육을 할 수도 없고, 국제법도 느슨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국가는 성선설과 가까울까? 성악설과 가까울까? 맹자나 순자도 생각하지 못한 주제다.


김석신 가톨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