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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망은 ‘강토소국 기술대국’”…구자경 회장의 연구개발 일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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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망은 ‘강토소국 기술대국’”…구자경 회장의 연구개발 일념

20년간 생산현장 지키며 LG 비약적 성장시킨 장본인
1976년 전사적 중앙연구소 설립…“사람 경쟁력을 높여라”
인재‧연구개발 중시하는 기업문화 뿌리내린 LG의 巨木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 명예회장(왼쪽)이 고 구본무 회장에게 LG 깃발을 전달하는 모습[사진=LG그룹]이미지 확대보기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 명예회장(왼쪽)이 고 구본무 회장에게 LG 깃발을 전달하는 모습[사진=LG그룹]

"오래 전부터 소망은 ‘강토소국 기술대국’이었다. 국토가 좁고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의존할 것은 오직 사람의 경쟁력뿐입니다. 지식과 기술 수준을 높여가지 않으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지난 2013년 구자경 명예회장의 생전 언급이다.

14일 별세한 고(故) 구자경 명예회장은 LG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시킨 장본인이다.

1925년 구인회 LG 창업 첫째 아들로 태어난 구 명예회장은 진주사범학교를 나와 5년 간 교편을 잡았다. 1950년 부친의 부름을 받아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화장품연구소로 합류하면서 경영 일선에 뛰어들었다.

화장품연구에 몰두해오던 구 명예회장은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후 주로 생산현장에서 직원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고 한다. 그는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기도 했다. 판매현장에 직접 나가 반응을 살피는 등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였다.

창업 초기부터 회사운영에 합류하여 부친을 도와 LG를 일궈온 1.5세대 경영인이었다. 구 회장은 196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LG는 부산의 부전동공장, 연지공장과 동래공장, 초읍공장, 온천동공장 등 생산시설을 연이어 확장하기도 했다. 당시 어느 공장이든 구 명예회장의 손을 거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공장에 따라서는 어느 상자에 어떤 공구가 들어 있고, 누가 어떤 작업을 잘 하는지도 훤히 꿰고 있을 정도였다.
LG화학 부산 연지동 공장(앞에서 왼쪽부터 구인회 창업회장,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사진=LG그룹]이미지 확대보기
LG화학 부산 연지동 공장(앞에서 왼쪽부터 구인회 창업회장,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사진=LG그룹]

락희화학공업사와 금성사(현 LG전자) 등에서 경험을 두루 쌓은 구 명예회장은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아버지 뒤를 이어 1970년 공식적으로 그룹 2대 회장에 올랐다. 구 회장 취임 이후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사업의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글로벌 LG의 기틀을 마련했다. 25년간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의 매출은 260억 원에서 30조 원대로 성장했고, 종업원도 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구 회장의 회장 재임 기간 동안 해외법인은 50여 개로 늘어났고,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알라바마주에 컬러TV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나아가 독일의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고인의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일념으로 전자와 화학 분야의 연구개발에 열정을 쏟아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수많은 국내 최초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 LG의 도약과 우리나라의 산업 고도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6년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하고. 1974년에는 산업 디자인 분야의 육성을 위해 금성사에 디자인 연구실을 발족시켰다. 일본 등 디자인 선진국에 연수를 지원하는 등 전문가 육성에도 힘을 쏟았다.

1978년 6월, 구 명예회장(오른쪽)이 럭키콘티넨탈카본(현 LG화학에 합병) 부평공장 3차 확장공사 준공기념 테이프를 커팅하는 모습[사진=LG그룹]이미지 확대보기
1978년 6월, 구 명예회장(오른쪽)이 럭키콘티넨탈카본(현 LG화학에 합병) 부평공장 3차 확장공사 준공기념 테이프를 커팅하는 모습[사진=LG그룹]

재임 내내 이어진 고인의 실천적 노력은 연구개발(R&D) 인재를 중시하는 LG 기업문화의 뿌리를 만들었다. 은퇴를 석 달여 앞둔 1994년 11월, 구 명예회장은 나흘에 걸쳐 전국 각지에 위치한 연구소 19개소를 일일이 찾아 둘러보았고, 훗날 그때 심정을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 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국토가 좁고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의존할 것은 오직 사람의 경쟁력뿐이라는 게 고인의 지론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퇴임 이후에도 인재육성과 기술개발에 힘써왔다.

1999년 10월 LG화학 여수공장을 방문해 시설현황을 살피고 있는 구 명예회장[사진=LG그룹]이미지 확대보기
1999년 10월 LG화학 여수공장을 방문해 시설현황을 살피고 있는 구 명예회장[사진=LG그룹]

구 명예회장은 故 구본무 회장에 경영자의 자세를 가장 큰 교훈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1995년 회장직 승계 당시 아들에게 “경영혁신은 끝이 없다. 자율경영의 기반 위에서 경영혁신은 계속 추진해야 한다. 그룹 구성원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합의에 의해 일을 추진하라. 권위주의를 멀리 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minc0716@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