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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전통 옻칠문화와 회화 접목 새 장르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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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전통 옻칠문화와 회화 접목 새 장르 시도

10월 뉴욕서 세번째 전시 갖는 서양화가 박보순

올 10월 뉴욕 준 켈리 갤러리서 세 번째 개인전 열어


40년 전 스승 만나 다시 전통문화 공부에 빠져


암 투병 20년 만에 극적 생환…힐링 아트로 감동 선사


▲ 서양화가 박보순 [글로벌이코노믹=노정용기자] 서양화가 박보순(64). 그에게 2013년 계사년(癸巳年)은 특별한 한 해가 될 것 같다. 지난해 가톨릭대 교수직을 과감히 내던지고 오는 10월 뉴욕 준 켈리 갤러리에서 전시할 회화작업에만 몰두해왔기 때문이다.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작업활동을 해온 박 화백은 요즘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다. 바로 20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옻칠문화를 회화와 접목, 옻칠회화라는 새 장르의 작품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박 화백에게 옻칠회화를 전수해주고 있는 주인공은 대학 은사이기도 한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 관장이다.

한국 최고의 옻칠 명장인 스승과 뉴욕에서 손꼽히는 작가인 제자가 40년 만에 만나 옻칠의 세계화를 위해 아름답게 힘을 합쳤다. 사실 옻칠회화는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김성수 관장이 만든 새 예술장르로서 작품을 손으로 만지고 느낄 수 있는데다가 별도의 서양식 프레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친환경 고급예술로 평가된다.

20년 간의 암투병 생활 끝에 극적으로 생환한 박보순 화백을 경남 통영옻칠미술관에서 만나 일반인에게 다소 낯선 옻칠회화 작업과 10월에 있을 준 켈리 갤러리 전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주>

▲통영옻칠미술관김성수관장(오른쪽)이40년전홍익대에서가르친제자인박보순화가에게옻칠회화를지도하며이야기를나누고있다.
▲통영옻칠미술관김성수관장(오른쪽)이40년전홍익대에서가르친제자인박보순화가에게옻칠회화를지도하며이야기를나누고있다.
-오는 10월 뉴욕 준 켈리 갤러리에서 전시가 잡혀있다면서요.

“그래서 올해는 제게 특별한 한 해가 될 것 같아요. 미국화랑협회 소속인 준 켈리 갤러리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여는데, 작가로서 이번에는 무엇인가 보여주어야겠다는 남다른 욕심도 나고요. 작품에 몰두하기 위해 지난해 가톨릭대 교수직도 내던졌어요.”

-요즘 옻칠회화를 배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대학 은사이신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 관장님이 제게 옻칠회화를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셨고, 저도 가볍게 ‘한 번 해보지, 뭐’라는 기분으로 시작했어요. 20호 크기의 목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자개를 붙이며 저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 같아요. 홍익대에서 목칠공예를 전공했지만 그때는 칠을 배우지 않았어요. 그런데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옛 스승을 다시 만나 옻칠회화를 배우니 감흥이 남다릅니다.”

-옻칠회화를 하기 전 옻칠에 대해 알고 계셨는지요?

“솔직히 고백하면 옻칠에 대해 문외한이었어요. 래커를 칠한 작품과 옻칠을 한 작품을 구분하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옻칠을 한 컵에 차를 마시면서 만지는 느낌이 참 좋았어요. 칠흑(漆黑)같은 어두움이라고 표현하는 흑칠이 만지면 만질수록 검은 광택을 내는데, 색깔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훌륭한 우리 옻칠문화를 ‘싸구려’ 래커칠과 혼동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요. 준 켈리 갤러리의 전시회에서 옻칠회화를 선보이려고 준비하는 것도 2000여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옻칠과 나전으로 표현하는 우리 문화를 제대로 알려보자는 일종의 사명감에서이지요.”

▲서양화가박보순
▲서양화가박보순
-옻칠회화를 한다고 하니까 화랑 관계자들이 만류하지 않던가요?

“옻칠을 시작했다고 하자 먼저 옻칠회화가 뭐냐고 물어요. 혹시 제 작업 성향이 바뀔까봐 우려하는 것이지요. 저도 회화에 옻칠을 한다는 게 처음엔 상상이 안 갔지만 해보니까 참 재미있고 매력이 있어요. 제 작업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소재를 다양하게 한다는 점도 흥미롭고요. 지금은 20호 크기의 소품에 했지만, 100호 크기의 대형작품에 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고 있어요.”

-옻칠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옻칠은 우선 광택이 나잖아요. 원래 제 그림은 광택이 나는 그림이 아닌데, 옻칠은 제 얼굴이 비칠 정도로 광택이 나요. 특히 옻칠은 시간이 흐를수록 광택이 더 나고 환경친화적인 게 좋아요. 제가 자주 사용하는 아크릴이 주는 맛과는 다르게 붓자국이 지나간 자리가 나중에는 살짝 퍼져 있고 참 특이해요. 또 캔버스에 아름다운 자개를 박는 것도 신기하고요. 아직 자개의 물성을 다 파악하지 못해 서투른 느낌이 들지만 나중에는 회화와는 별도로 자개가 주는 아름다움만으로도 관람객들에게 재미를 선사할 것 같아요.”

▲옻칠회화를그리고있는서양화가박보순
▲옻칠회화를그리고있는서양화가박보순
-박 화백의 작품을 보면 아크릴이 유화나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평론가와 작가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부분이에요. 아크릴은 재료 특성상 굉장히 빨리 마르기 때문에 색깔이 겹쳐지는 부분에서 투명하게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아크릴을 사용하지만 색과 색이 겹쳐져 캔버스 밑에서부터 배어 나오게 그려요. 이처럼 여러 색이 겹쳐서 오묘한 색을 드러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작품 사진을 찍기가 힘든 단점도 있어요. 사진작가들조차 겹쳐진 색을 잡아내기 어렵다고 토로해요. 이처럼 여러 색이 겹쳐 전혀 다른 색을 드러내는데, 이 색이 때로는 유화로, 때로는 수채화의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뉴욕에서 빅애플 페스트의 작가로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9·11테러 직후 뉴욕 전체 분위기가 침체해 있었어요. 이 같은 분위기를 공공미술로 새롭게 바꾸어보자는 생각에서 뉴욕시는 2004년 뉴욕의 상징인 ‘빅애플’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지요. 저는 세계 굴지의 화장품 회사인 에이본사의 후원을 받아 라커펠러센터에서 높이 1.22m(4피트), 직경 1.22m(4피트)의 대형 사과 모양의 캔버스에 희망을 주는 단어들을 새겨 넣은 설치작품을 전시했어요. 핸드라이팅으로 네다섯 번 칠해야 글이 쓰여지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또 맨해튼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병원의 소아과 병동에 빅애플 그림을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공공미술로서 빅애플 100개가 만들어진 가운데, 제가 두 개의 작품을 만들었지요.”

-지난 2006년 뉴욕화가 100인(100 New York Painters)에 선정되셨는데….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신시아 마리스 댄식(Cynthia Maris Dantzic)이 살아있는 뉴욕 작가 100인을 선정해 책을 펴냈지요. 저자가 포토리얼리즘 화가 척 클로스 등 유명인을 인터뷰하고 소개했는데, 저자가 제 그림을 잘 알고 있었어요. 제 그림 스타일을 보며 ‘아크릴을 당신처럼 쓰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며 아크릴 쓰는 테크닉을 특이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20년 간 암투병을 하고 이겨내셨는데….

“지난해 9월에야 항암주사 맞는 걸 끝냈어요. 1992년 3월에 처음 암판정을 받은 후 1998년과 2002년에 다시 재발하는 바람에 20년 간 기나긴 암투병 생활을 해온 셈이지요. 그러나 다른 암환자처럼 침울해 하지 않고 밝게 웃으며 생활해 왔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생각에서 혼자 자축을 했지요. 3주마다 주사를 맞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어요. 중간에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었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항암치료를 중단할 수 없었어요.”

박 화백은 주치의로부터 항암치료를 그만해도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이 묘해서 혼자 여행을 떠났다. 1박 2일 동안 충청도로 가서 가을의 향취를 맘껏 느꼈다고 한다.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것 있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마냥 평화롭고 자연스러웠어요. 자유를 얻고 해방된 기분이랄까.”

▲박보순작'BeingAndSoul'
▲박보순작'BeingAndSoul'
-투병 기간 중 그림 스타일이 바뀌지 않았나요?

“의식적으로 바꾼 적은 없는데 사람들이 연관을 지어요. 주로 누드와 사람을 형상으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신체의 일부를 떼어낸 후 그림을 그릴 때 저도 모르게 상실감이 표출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한 사람이 침대 끝에 앉아 있고 창문이 뒤에 위치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의사를 만나기를 기다리는 환자의 초상이라고 하더군요. 그때는 사실 암이 지나갔고 재발하기 전이었어요. 그후 ‘아! 이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2002년 세 번째로 암이 재발하자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당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제일 힘든 때였지만 오히려 그때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박 화백은 1991년 라이프(life)를 주제로 동경 우에노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우에노미술관은 전시를 연 작가에게 다음해에 벽면 하나를 할애하는 전통이 있는데, 암이 재발한 1992년에는 누드 3부작(life)을 전시했다.

▲박보순작'기대'
▲박보순작'기대'
-살아 있는 모습 자체가 희망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암이라면 절망을 느끼게 되는데, 살아 있다는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사생활이 다 공개되는 세상인지라 저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인터넷을 검색해보고 ‘교수님에게는 암환자라는 레이블이 붙어다녀요. 교수님을 생각하면 어떤 힘든 일이 닥쳐와도 희망을 갖게 됩니다’는 말을 할 때 굉장히 보람이 있어요. 암 환자만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지난해 오페라 ‘토스카’ 속에 등장하는 무대 그림을 실제 회화로 그렸는데….

“오페라와 미술의 합작(collaboration)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진행되었어요. 1막에 화가인 남자 주인공 카바라도시가 ‘마리아 막달레나’의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가로 180㎝, 세로 240㎝의 대형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렸지요. 작품 제목은 카바라도시가 이 그림 앞에서 토스카의 사진을 꺼내들고 두 여인을 비교하며 부르는 아리아의 제목이기도 한 ‘오묘한 조화(Recondita Armonia)’입니다.”

-지난 2008년 가나아트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후 유방암 환우들과 함께하는 ‘힐링갤러리’를 열었지요?

“암투병 끝에 새 생명을 얻은 후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힐링갤러리를 열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제가 그림을 통해 그들을 치료해준다는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을 통해 전시 준비하느라 지친 제 몸을 치유받고 있는 거예요. 참가자들 대부분이 붓을 처음 들어보기에 멈칫거렸지만 강의를 듣고 난 뒤 잠재력이 폭발해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작품을 만들어내요. 힐링갤러리에서 ‘여러분 행복하세요?’하고 물었는데, 모두들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게 ‘네’라고 대답해요. 힐링갤러리의 반응이 폭발적이라는 것을 알고서 지난해에도 한국로슈와 ‘치유와 예술의 공간, 힐링갤러리전’을 열기도 했어요. 미술을 통해 암환자들에게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지요.”

작가는 실제로 그림을 통해 사람을 치유한 개인적인 경험을 들려줬다.

“2002년 미국의 플로리다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거식증에 걸린 핀란드 출신의 한 학생이 자살을 기도하다 제 그림을 보고 희망을 가졌다고 해요. 작가로서 대단한 보람도 느꼈고 동시에 커다란 책임감도 느꼈어요. 그 학생의 할머니가 ‘손녀의 생일에 당신 그림을 선물하고 싶다’는 전화를 해와 그 말을 듣고 휴가를 가던 중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정성껏 그림 한 점을 그려드렸지요. 이처럼 그림에는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힐링아트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표현에 대한 욕구가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욕구이지요. 연필을 어떻게 잡는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기들은 연필을 잡고 뭔가 그려냅니다. 연필이나 물감이 없을 때에도 돌로 그림을 그리는 표현의 욕구가 있었지요. 힐링아트는 바로 사람들의 잠재된 표현 욕구를 자극하고 서로의 좋은 에너지를 교감하면서 치유하는 것 같습니다.”

박보순 화백은 지난해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작업실을 마련, 서울과 통영을 오가며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옻칠회화를 작업하는 공간인 통영옻칠미술관은 멀리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빼어난 경치를 보며 작업을 하고 있노라면 마치 명상(meditation)을 하는 것 같다고 한다. 아늑하고 꿈같은 곳에서 옻칠회화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 올 가을에 개최할 전시회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국에서보다 뉴욕에서 더 유명한 화가 박보순. 그의 전시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