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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삶이 중요…우주의 주인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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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삶이 중요…우주의 주인은 '나'"

[스페셜-한국불교 대표적 실천적 수행자 도법 스님]

"한국불교 깨달음 너무 신비화…깨우치면 누구나 부처"


소유가치보다 존재가치 찾아야 우리 삶 행복해져


"젊은이여! 개성 있게, 주체적으로, 창조적인 삶 살아라"


불교는 불교다워야 하고 한국불교‧현대불교 색깔 찾아야

▲도법스님
▲도법스님
[글로벌이코노믹=노정용기자] 불교계의 대표적인 실천적 수행자로 손꼽히는 도법 스님은 “불교는 불교다워야 한다”고 일갈한다. 불교답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지금 한국불교를 돌아보면 대승불교답지 못하고, 과거불교에 발이 묶여 있고, 한국불교가 아닌 중국이나 인도불교를 얘기하고 있는데, 불교 본래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법 스님은 또 한국불교가 너무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존재의 본질을 깨우치게 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먼 훗날의 삶보다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며 누구나 개성 있게, 주체적으로,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한국 불교계의 큰 스님으로 불리는 도법 스님을 만나 삶의 고단함에 지쳐 고민하고 있는 중생들에게 피와 살이 될 법문을 들었다. 이 법문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우친다면 비록 수행승이 아닐지라도 우주에서 가장 거룩하고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도법 스님의 전언이다. <편집자 주>

-거처하시던 실상사에서 번잡한 도심의 조계사로 나오셔서 불교 개혁을 위해 바쁘게 지내고 계십니다.

“난 산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운동하는 사람이에요. 더 정확히 말하면 산 사람도 아니고 도시 사람도 아니고 ‘거리(에 있는) 사람’이지요. 어떻게 보면 산이나 도시에 다 적응한 것 같기도 하고, 낯설기도 합니다.”

-불교가 처한 문제와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성역 없는 토론과 대화를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부대중 야단법석’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요?
“지난해 3월 28일부터 내년 12월 22일까지 1000일 동안 ‘민족화해, 평화통일 한반도 생명평화 공동체 1000일 정진결사’를 하고 있어요. 1000일 정진결사는 조계사에서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민족사적, 문명사적 대안을 모색하는 정진을 하는 것이고, 생명평화 1000일 용맹정진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화와 다툼, 크고 작은 폭력의 병을 치유하여 뭇 생명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길 바라는 정진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를 표방하고 있지만 대승불교답지 못하고, 한국이니 한국불교를 얘기해야 하는데 중국불교나 인도불교를 이야기하고, 현대불교가 아니라 과거불교에 묶여 있어요. 그래서 사부대중을 비롯한 시민대중이 참여해 우리의 아픔을 드러내고 치유하고자 ‘사부대중 야단법석’을 만들었어요. 야단법석은 우리 전통의 광장문화이자 대화마당입니다. 이제 봄이 되어 날씨가 풀렸으니 사부대중 야단법석을 다시 시작할 겁니다.”

도법 스님에 따르면 불교는 대화를 대단히 중시여기는 종교다. 한국사회 또는 인간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대화와 토론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 사회가 주장과 논쟁만 있지 대화와 토론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 내부도 마찬가지라는 게 도법 스님의 진단이다.

“불교는 대화와 토론을 대단히 중시하는 종교였으며 부처님은 대화와 토론의 달인이었어요. 경전에 보면 부처님의 언행이 잘 나와 있지요. 언어를 잘 알고 대화와 토론을 잘해내면 우리 인생 문제의 60~70%는 해결할 수 있어요. 우리가 짊어진 짐의 무게를 100근이라고 할 때 대화만 잘해도 60~70근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얼마나 홀가분하겠어요.”

▲도법스님
▲도법스님
도법 스님은 한국불교가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먼저 수도승들이 알게 모르게 한국불교가 아닌 중국이나 인도 불교를 얘기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법문할 때나 강의할 때 육조, 달마 등 중국 스님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한국이 낳은 원효, 보조, 의상 스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들이 제시해놓은 불교관을 이야기 하지 않음으로써 한국불교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한국불교는 현대불교가 아니라 과거불교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오늘의 한국불교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대신에 1000년 전 만든 법당이나 탑에 대해 자랑하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한국불교는 대승불교, 한국불교, 현대불교 답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대승불교, 한국불교, 현대불교가 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지금의 ‘민족화해, 평화통일 한반도 생명평화 공동체 1000일 정진결사’라는 것이다.

-실천적인 수행자로서 20년 전부터 한국 불교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결사의 필요성을 주창해 왔습니다. ‘21세기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소카선언)’도 그 연장선입니까?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처음부터 계획하고 준비한 게 아니고 그때그때 개인적 고민, 집단적 고민, 사회적 고민, 시대적 고민을 하면서 찾아온 대답입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게 종교평화선언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평화를 추구하고 그 이상인 평화가 현실로 이루어지려면 종교문제를 풀어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해요. 여러 가지 싸움이 있지만 가장 치열한 싸움이 종교전쟁입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쟁의 60~70%가 종교전쟁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사회가 단순히 남북문제나 진보보수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갈등과 대립이 언제 걷잡을 수 없는 분쟁으로 치달을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종교평화선언을 한 것입니다. 시대적‧사회적 공감과 호응이 컸는데도 불교내부에서 소화를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국민 화합과 사회통합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마을(강정) 공동체가 무너지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등 사회지도자는 물론, 종교계도 이 같은 갈등을 치유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글쎄요…. (갈등을 치유할) 길은 있는데, 사람들이 안 가는 거예요. 왜 그러겠어요? 자기에게 유리하면 그 길을 가고, 그렇지 않으면 안 가는 게 문제이지요. 모두들 자기 편한 길로만 가려고 해요. 세상은 함께 살게 되어 있는데, 각자 내 살길을 찾아 치닫는 게 문제입니다. 본질적인 진단이 필요한데,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세계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어요. 잘못된 세계관으로 인해 결국 편가르기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와 같이 따로 따로 각각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세계관이 문제에요. 너와 나의 관계에서 자기중심적 사고로 사물을 바라보니 싸움 밖에 더하겠어요? ‘너 따로 나 따로’의 이원적 세계관이 문제이고, 서로 분리되어 있다 보니 늘 경쟁하고 상대를 적으로 생각해요. 이처럼 잘못된 세계관에 따라 편가르기를 하며 첫단추를 잘못 끼었으니 다음 단추가 다 어긋날 수밖에 없어요. 이 문제를 풀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잘못된 단추를 풀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꿰맞추려고 해도 풀리지 않아요. 기존 관념이 ‘너 따로 나 따로’ 되어 있지만, 실제 우리 사회는 동전의 양면처럼 온통 서로 의지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게 되어 있어요. 따로 따로가 아니니까 적대적이거나 대립적인 삶을 살 수 없고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고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도법스님
▲도법스님
우리 사회는 손의 손바닥이나 손등과 같이 결코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 조상들은 이웃사촌과 품앗이의 개념으로 서로 의지하고 신뢰하고 나누었다. 품앗이라는 정신으로 마을공동체를 이어갔고, 그런 세계관이 바탕이 되었으니 갈등이 아닌 화합을 이룰 수 있었다고 도법 스님은 일갈한다.

“모두가 한 손의 손바닥과 손등처럼, 혹은 동전의 양면처럼, 혹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사는 세계관을 확립하게 되면 화합과 평화가 오게 되지요.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냉철한 자기성찰과 진지한 진단을 통해 세계관을 바로잡는 일이 필요합니다. 한 번 우리 주변을 돌아보세요. 하늘과 땅, 산과 숲처럼 온통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의 망으로 구축되어 있어요. 그물의 그물코처럼 온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은 서로 의지하며 존재해요. 이런 세계관이 삶으로 나타난 게 품앗이와 이웃사촌입니다. 서로 어울려서 더불어 함께 사는 것, 이것이 인간 삶의 참된 모습 아닐까요?”

-‘한국 불교가 깨달음 때문에 문제다’고 일갈하셨습니다. 종교는 깨닫고 그 깨달음을 실천하는 게 바른 길 아닌지요?

“불교는 깨달음과 수행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믿음과 신앙의 종교에요. 그런데 불교에서 깨달음이 너무 신비화 되다 보니까 실제 생활에서는 반영이 안 되고 있어요. 지금 현재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은 너무나 심오하고 특별하고 고매하고 미묘한 나머지 우리가 추구해서 도달해야 할 저 멀리 있는 목적지라고 알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 여기 바로 쓸 수 있는 깨달음이 아니지요. 과연 부처님이 이야기한 깨달음이 지금, 여기와 관계없이 저 먼 훗날, 밤잠을 설치며 참선하고 삼매를 이루어야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깨달음은 보통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면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게 아니라고 봅니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서 실천해야 할 내용이지, 먼 훗날 도달해야 할 내용이 아닙니다. 이게 왜곡되어 한국불교는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어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의 진리는 지금 여기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서 바로 실현이 된다, 현실에서 검증할 수 있다’고 하지요. 반대로 지금 이해가 안 되고 실현이 안 되고 현실에서 검증이 안 되면 불교가 아니거나 불교와 관계없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에요. 먼 훗날 이루어지는 깨달음이라면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도법스님
▲도법스님
한국불교는 부처님이 이야기한 깨달음을 왜곡하여 신비한 그 무엇으로 다룬다. 그러면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의 대상은 무수히 많을 수 있는데 한 가지 예로 든다면 ‘만들어진 신’이라는 개념이다.

“사람들은 신의 실재를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하잖아요. 그러나 과학자들은 그런 신은 실재 하지 않고, 너희들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건 사람의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의 생각이지 실존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따라서 신이 실재하지 않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신의 실재를 알고 사는 것과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삶을 낳습니다.”

-모든 중생들의 소원인 성불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부처입니다. 있는 걸 있다고 하고, 없는 걸 없다고 하는 사람이 부처이지요. 그런데 모두 부처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실상사의 제 방에 가면 부처님이 어떻게 생겼을까, 또 부처는 어떻게 살까, 라는 질문에 딱 답해놓은 주련(柱聯)이 있어요. 먼저 부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물었을 때 거기에 대한 대답이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두 발은 땅을 딛고, 눈은 옆으로 찢어져 있고, 코는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고 해요. 부처님이 누굴 닮았어요? 우리 자신을 닮았어요. 바로 사람의 모습이지요. 그 다음에 부처는 어떻게 살까, 하고 물었는데, 밥이 오면 입을 열고, 졸음이 오면 눈을 감는다고 해요. 이렇게 사는 사람이 부처인데, 어떤 사람일까요? (기자) 선생은 밥이 오면 입을 다무세요? 입을 열잖아요? 졸음이 오면 눈을 떠세요? 눈을 감잖아요. 이처럼 부처의 존재나 살림살이가 특별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부처이고, 삶 자체가 부처예요. 배고프면 밥 먹고, 잠이 오면 잠자고…. 그러면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존재 자체가 부처인 줄 알고 그 삶에 스스로 만족하고 자부심을 갖고 사는 사람은 부처이고, 그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중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생들이 자신은 미완성이자 문젯덩어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히 만족하거나 자부심을 가질 수 없지요. 만족을 못하니 불행한 사람 아닌가요?”

도법 스님은 깨달음을 신비화 해서는 안 되며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거룩하고 존재 행위는 신비하다고 설파한다.

▲도법스님
▲도법스님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게 기적입니까, 아닙니까? 눈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기적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지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합시다. 코로 숨 쉬는 게 시시한 일입니까? 이보다 더한 신비나 기적이나 불가사의한 일은 없어요. 실재와 실상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존재가 누구였나요? 바로 인간이죠. 인간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만들어졌나요? 우리는 이걸 모르고 지내고 있어요.”

-지난 2004년부터 5년간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했습니다. 그때 무엇을 깨달으셨는지요?

“현장을 누비면서 인간 존재 자체가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지 경험하고 검증했어요. 예를 들어 내 아들딸이 장님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눈을 뜨고 본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할 수 있을 거예요. 누가 천금을 가지고 와서 선생의 눈을 달라고 하면 줄 수 있어요? 천하의 권력을 주겠다고 하면서 선생의 코를 달라고 하면 줄 수 있어요?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더 거룩하고 신비한 건 없어요. 이 실재를 아는 게 부처에요. 서울대 졸업장이 더 중요합니까, 아들의 두 눈이 더 중요합니까? 권력이나 명예를 준다한들, 이 둘을 바꿀 수 있겠어요? 결코 바꿀 수가 없어요. 우리 존재 자체가 거룩하고 위대하고 가치 있어요. 따라서 우주를 준다한들 우리 생명과 바꿀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돈이 있는지 없는지, 서울대 졸업장이 있는지 없는지로 사람을 평가해요. 그토록 서울대 졸업장이 중요하다면 당신의 두 발과 바꾸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현실에서 서울대 졸업장과 당신의 두 발을 바꾸자고 하면 바꾸실 건가요? 이처럼 우리는 관념으로, 허상으로 살고 있어요. 서울대 졸업장 가지고 있으면 그 앞에서 기죽고, 비인간화 되어 있어요. 서울대 졸업장이 있다고 으스대는 놈도 웃기고, 없다고 그 앞에서 기죽는 놈도 웃겨요. 인간에 의해 조작된 졸업장이 있냐 없냐, 부자냐, 가난하냐로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을 소유가치의 기준으로 평가하게 되면 권력을 가졌느냐, 돈을 가졌느냐, 지식을 가졌느냐, 학벌을 가졌느냐로 평가하게 되는데, 소유 욕구를 쫓는 한 인간은 영원히 비인간화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소유가치보다는 존재가치에 비중을 둬야 합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귀중하고 거룩하고 위대하고 가치 있는 존재이므로, 돈이나 지식이나 권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운동을 발족하셨는데, 어떤 운동입니까?

“불교 세계관과 정신을 대중화하고 생활화하자는 운동이에요. 불교 세계관은 연기적 세계관, 일반 언어로 풀어 말하면 관계적 세계관이지요. 따로따로가 아니라 온통 관계를 맺고 하나의 그물처럼 되어 있어요. 시간과 공간, 유형과 무형, 내면과 외면, 정신과 물질, 마음과 몸 등 모든 존재는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돼 있고 서로 의지돼 있고 서로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도록 돼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야 해요. ‘나’라는 그물코와 ‘너’라는 그물코가 있는데, 나는 너와 함께 살 수 없다며 공격하면 ‘너’라는 그물코가 없어지기 때문에 ‘나’라는 그물코도 성립되지 않아요. 인드라망 세계관을 대중화하고 생활화 하는 것이 불교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람직한 대안이 됩니다. 전통 속에서, 사회적‧역사적 현상 속에서 이웃사촌과 품앗이의 마을공동체 운동이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도법스님
▲도법스님
-불교 언어는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습니다. 초기불교는 사성제를 실천해 해탈 열반하자고 했고, 중국 선종은 마음이 불교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시대에 맞는 새로운 처방이 필요합니다. 큰 스님께선 어떤 처방을 내리시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소유의 가치를 중심으로 처방을 해왔는데, 그렇게 해서는 해답이 없고 결론도 나지 않아요.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존재가치를 중심에 놓고 문제에 접근해야 해요.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존중받는다면 누구나 대통령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소유가치를 내려놓고 이제는 존재가치를 중심에 놓고 삶을 바라보고 다루면 많은 부분이 정리되고 새 희망이 꽃 필 수 있을 겁니다.”

-불법보다 돈과 권력을 우선시하는 불교 현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셨는데….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존재가치가 아닌 소유가치에 매몰된 결과이지요. 돈이 있나, 없나 하는 소유가치로 가버린 결과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어버렸어요. 일반인도 소유가치를 버리고 존재가치를 찾아야 하거늘 수행자가 소유가치에 매달린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의식개혁 없는 쇄신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의식개혁을 제대로 해낼 수 있도록 불교관과 실천론을 잘 정리하는 것은 한국불교 내일의 사활이 걸린 일이다”고 하셨습니다. 불교관이나 실천론 정리작업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요?

“불교관과 실천론을 정리하는 작업이 쇄신운동의 핵심이에요. 아직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종단 구성원도 일반 세상에 회자되는 돈이나 정치나 권력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축이 있는가 하면, 욕심을 버리고 순수하게 불교사상과 정신을 갖고 실천하는 축이 있어요. 후자 쪽에 계신 분이 중심이 되어 대승불교, 한국불교, 그리고 현대불교다운 실천론을 정리하고 이 정신으로 무장해보자는 게 의식개혁론의 핵심입니다. 잘 되면 올 상반기에 한국불교는 이런 불교관과 실천론으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교의 존재이유는 무엇인지요?

“종교의 존재 이유는 평화와 행복에 있습니다. 종교전쟁이 빈번하고 세습 갈등이 있는 건 종교의 본래취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오는 부작용이지요. 종교를 풀어보면 종(宗)은 마루 종으로,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 바탕, 최고를 의미합니다. 공간을 놓고 보면 종은 바닥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닥은 벽이 없잖아요. 바닥에 의자와 책상을 놓고 인간이 벽을 만들어 놓았을 뿐 원래 바닥은 벽이 없고 편이 없어요. 이 세상은 한 바닥으로 이루어져 다 통하기 때문에 벽이 없고, 차별이 없어요. 지구는 원래 하나입니다. 미국이, 중국이 선을 그어놓고 싸우고 있는데, 그 선은 본래 지구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종교는 이걸 가르치는 것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편을 갈라 싸우는 건 세속의 일이지 종교의 일이 아닙니다. 종교라는 이름, 국가라는 이름,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건 본래 종교를 떠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종교의 존재 이유는 생명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사실 종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존재의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바람입니다. 보통사람은 이걸 실현하기 위해 편을 갈라 싸워 이겨야 평화롭다고 생각하는데, 이기면 평화가 옵니까? 소유가치를 놓고 다루어서는 결코 평화가 올 수 없어요.”

-복지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복지란 무엇입니까?

“세계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어야지 복지로는 그 문제를 풀 수 없어요. 안 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좀 낫기는 하겠지요. 소유가치가 아니라 존재가치로 살아야 한다는 세계관을 회복해야 진정한 복지를 실현할 수 있어요. 세계관을 바로잡는 일과 소유가치가 아니라 존재가치라는 가치관을 중심에 놓을 때 해답이 나와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 사회가 근원적인 문제를 짚지 않고 현상적으로 처방을 하려고 하는데 ‘에어컨 처방’과 같아요. 더우면 일시적으로는 에어컨을 켜서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에어컨을 쓸 수 있는 곳보다 쓸 수 없는 곳이 많기 때문에 언제나 부분 처방 밖에 되지 않아요. 그러면 에어컨 처방에 길들여진 사람이 편안하거나 행복하겠어요? 일부만 편안할 뿐이에요. 요즘 우리 사회에 빈번한 자살이나 위로받고 처방받고자 하는 것도 모두 에어컨 처방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에어컨 처방은 인간을 더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도법스님
▲도법스님
도법 스님에 따르면 365일, 24시간 동안 에어컨을 켜놓고 산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다 골병든다고 한다. 게다가 내가 시원하기 위해 에어컨을 사용하게 되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밖에 없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나쁜 놈이 된다. 따라서 에어컨 처방은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게 큰 스님의 진단이다.

-가치관이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찾아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요?

“시대와 관계없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어요. 혹자는 생명의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하면 너무 추상적이라거나 이상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생명보다 더 중요한 현실문제는 있을 수 없어요. 생명이 살아 있어야 자유를 외치든지, 연애를 하든지 하잖아요. 생명의 문제는 존재가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한 목숨, 행복하게 평화롭게 살고 싶은가요? 우리 시대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틀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생명일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는 청년들은 실업문제로 아픔을 겪고 있고, 중장년층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이 아픔을 치유할 방안은 무엇인지요?

“왜 위로받고 치유받아야 하나요? 위로받고 치료받아야 하는 상황은 뭔가요? 그것은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능한데, 가장 본질적으로, 핵심적으로 얘기한다면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개성 있게, 창조적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에요. 기존 지식이나 관념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거죠. 일자리가 있네, 없네 하고 있는데, 왜 일자리가 없어요? 길은 천 갈래 만 갈래가 있어요. 100명만 달릴 수 있는 포장도로에 온통 경쟁적으로 몰려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100명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다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아수라장이 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일자리가 없다고 아수라장이지만, 진짜 일자리가 없습니까? 그저 편한 일, 돈 쉽게 버는 일만 찾다보니 일자리가 없는 거예요. 저기가 매끈하고 편해 보이는 포장도로이지만 ‘난, 내 도로로 갈거야’ 하면 천 갈래, 만 갈래 길이 있어요. 문제는 포장도로로 가는 길만 적응하여 비포장도로 갈 방법을 몰라서 적응을 못하고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위로나 치료를 받아야 하고, 직장이 없다고 징징대는 건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개성적으로,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배짱과 근성이 없기 때문이에요. 인생에는 배짱과 근성을 가지고 새로운 도전도 하고 대범한 시도도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불교계와 일반 국민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소유가치보다는 존재가치를 깨달으라고 하고 싶어요. 관념적으로 살지 말고 그리고 종속적으로 살지 말고 주체적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내 인생의 주인은 나 자신이고, 우리 집의 주인은 나이고, 이 세상의 주인도 나라고 한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우리는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의 주체를 자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주체적으로, 개성적으로,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게 해답이에요. 사실적으로 실제적으로 다루어야만 길이 나오고 답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