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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자의 레드라인] 길어지는 대전략 부재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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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자의 레드라인] 길어지는 대전략 부재의 시대

이교관 CNBC KOREA 대기자
이교관 CNBC KOREA 대기자
외환위기의 먹구름이 몰려오던 1997년 가을 박정희 대통령의 최장수 비서실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정렴 전 재무장관의 회고록 ‘아, 박정희’가 출간됐다. 읽고 나니 김 전 장관을 직접 만나 경제 발전에 관한 박 대통령의 숨은 일화들을 더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연락해 그의 서대문 자택을 찾았다.

처음엔 책에 쓴 일화들 외에는 더 없다던 김 전 장관은 잠시 숙고한 뒤 중요한 일화가 생각났다면서 들려주었다. 박 대통령이 오전에 주요 회의가 없는 날이면 새벽에 서울역으로 이동해 4량짜리 전용 전동차를 타고 주요 산업의 공장들을 비공개로 찾았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계속된 새벽 공장 방문들에서 기업들의 고충을 듣고 돌아와 이를 비서실과 내각에 전달했는데 이것이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김 전 장관은 회고했다.

실제로 대통령의 비공개 새벽 산업 현장 방문은 어마어마한 효과를 낳았다. 기업들은 대통령의 격려에 고무돼 제품 혁신에 더욱 매진했고, 비서실과 관련 부처들은 산업 정책을 가다듬고 개발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이 그 바쁜 국정 속에서 새벽 공장 방문을 계속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한미동맹과 국방력 증대를 바탕으로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발전을 통한 중진국 도약’이라는 대전략의 실현에 인생 전체의 승부를 걸었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략을 상상에 연계하면 모든 지점의 진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힘인 혜안(coup d’oeil)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새벽 공장 방문을 통해 평소 상상해온 산업 전략의 타당성을 확인함으로써 경제 발전과 관련된 모든 지점의 진실을 알아보는 혜안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랬기에 그가 산업별로 예상되는 도전들에 선제적으로 대처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김 전 장관의 회고와 클라우제비츠의 언명을 종합하면 한 나라의 발전 여부는 다음 두 가지에 달려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는 리더가 목숨 걸고 추구하는 대전략이 있느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리더가 대전략의 실현을 위한 전략을 늘 상상하면서 그 타당성을 수시로 공장 등 현장을 찾아 확인해 모든 지점의 진실을 알게 되는 혜안을 얻음으로써 산업별로 예상되는 도전들에 선제적으로 대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이 추구해야 하는 대전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역사는 한 시대의 핵심 기술을 확보한 국가가 패권을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은 제철,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 등 주요 제조업들을 크게 발전시켜 왔고 이 시대의 핵심 기술인, 반도체 등 첨단 산업들에서 경쟁력을 키워 선진국 초입까지 왔다. 안보의 경우 북한이 핵 개발에 성공한데다 중국의 핵 위협도 큰 만큼 핵 억제력 확보가 시급하다. 이 같은 경제와 안보 상황은 한국의 대전략이 한미동맹 강화를 통한 북한과 중국의 핵 위협에 대한 확실한 억제력의 확보를 전제로 이 시대의 핵심 기술인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양자 컴퓨팅 등 주요 첨단 산업들의 발전을 통해 선진 강국으로 도약하는 것으로 모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존 루이스 개디스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대전략론’에서 “대전략은 무한한 열망과 제한된 수단 간의 균형”이라고 정의한다. 현재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고 지난 8월 18일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3국 안보협의체에 합의함으로써 그전보다 강력한 북핵 억제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한국이 한미동맹과 한·미·일 3국 안보협의체를 통한 핵 안보를 바탕으로 첨단 IT 산업의 발전을 통한 선진 강국 도약이라는 대전략을 추구한다면 이는 개디스의 대전략 정의에 부합한다.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대전략이 있는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그가 한·미·일 3국 안보협의체라는 외교 성과는 거두었으나 이를 바탕으로 반도체 등 첨단 산업들을 글로벌 표준을 주도할 정도로 발전시켜 선진 강국으로 도약하는 것을 대전략으로 제시한 적은 없다.

최근 국방부가 육사에 있는 독립지사 홍범도 장군 흉상을 그가 말년에 연금 수령을 위해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을 이유로 철거하기로 하면서 이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윤 대통령의 평소 담론에서 ‘자유’와 ‘이념’ 등이 차지하는 비중은 큰 반면 위의 대전략 같은 명제는 눈에 안 띈다는 것이다.

만약 윤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위의 대전략을 추구해 왔다면 첨단 산업 공장들을 찾아 고충을 듣고 해결함으로써 스테이츠맨의 위상을 확고히 했을 개연성이 크다. 그랬다면 지지율이 안정돼 내년 총선을 겨냥해 이념 전쟁을 벌인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대전략 부재의 시대가 너무 길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각각 정부 주도 발전 전략들인 신뉴딜질서와 중상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이 대전략 없이 기업과 시장에 발전을 위탁하는 신자유주의를 고수해서는 미래가 없는 것이다.


이교관 CNBC KOREA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