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7 12:50
지하철역 계단에 올라서는데 와락 달려드는 바람 끝이 제법 매웠다. 성긴 옷섶을 여미며 약속장소로 걸음을 서두르다가 가로변 화단에서 보라색 꽃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다름 아닌 해국이다. 추운 겨울이 바로 코앞인데 이렇게 뒤늦게야 꽃을 피우다니! 반가움과 안쓰러움이 교차하며 마음 안섶이 마른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렸다. 남쪽의 바닷가나 울릉도나 제주도 같은 섬의 절벽에서 볼 수 있는 꽃인데 도심의 화단에서 마주치고 보니 약간 생뚱맞고 어색하긴 해도 반갑기 그지없다. 해국(海菊)은 이름처럼 바닷가에 피는 야생국화다. 가을 산야에 흐드러지던 산국, 감국, 구절초, 쑥부쟁이와 같은 국화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찬바람 매2019.11.20 10:32
거리는 온통 낙엽의 물결이다. 가을 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빛나던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밤새 몸살이라도 앓은 듯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소공원의 벚나무들은 바람도 없는 허공으로 물든 이파리를 함부로 뿌려대며 몸을 비우는 중이다. 서둘러 잎을 내려놓은 채 고요히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운문선사의 '체로금풍(體露金風)'이란 법문이 부록처럼 따라온다. 가을바람에 잎이 진 뒤에야 나무의 본체가 완연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른 봄부터 어여쁜 꽃만 탐하던 나를 번쩍 정신 차리게 하는 장군죽비 같은 말씀이기도 하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휴일 저녁, 경기도 포천의 '하늘아래 치유의 숲'에서 찍은 사진들2019.11.13 12:13
나름 꽃을 찾아 전국을 떠돌며 오랜 시간 자연과 함께 해왔다고 자부했던 것이 오만이었을까. 올가을 단풍 구경은 제대로 때를 맞추지 못해 속절없이 끝나버렸다. 내장산에 갔을 땐 너무 일러 채 단풍이 들지 않았고, 주왕산을 찾았을 땐 너무 늦어 절정을 지나 이미 낙엽이 지는 중이었다. 자연의 때를 알아차리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다. 노랗게 물든 이파리를 함부로 뿌려대던 은행나무들이 며칠 새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을 보니 곧 겨울이 들이닥친 모양이다. 비록 절정의 단풍은 보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희귀수목인 망개나무를 직접 보고, 주왕산의 깃대종인 바위 암벽에 붙어사는 둥근잎꿩2019.11.06 13:03
숲을 사랑하는 지인들과 정읍으로 가을여행을 다녀왔다. 구절초 축제와 옥정호의 물안개, 그리고 내장산 단풍까지 살뜰히 즐겨볼 요량이었지만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구절초행사장은 너무 늦게 찾아간 듯 게으른 꽃 몇 송이만 남아 있었고, 내장산 단풍은 너무 일찍 찾은 듯 청단풍만 청청하여 일찍 물든 성질 급한 단풍나무 아래서 겨우 인증샷만 남겼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한 장면과도 같은 옥정호의 새벽 물안개를 맘껏 즐긴 것이었다. 비록 시절인연이 닿지 않아 바라던 대로 모든 것을 얻지 못한 여행이었지만 위대한 자연과 마주하는 일이 절대 간단치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점차 산빛이2019.10.30 13:08
아침저녁으로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 끝이 차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을 지나며 부쩍 바람의 기울기가 가팔라지는 느낌이다. 가을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한 채 이대로 겨울이 들이닥칠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나던 참에 숲 해설가 동기들이 구절초축제로 유명한 정읍으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인데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꽃까지 실컷 볼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여행을 가기로 마음을 굳힌 순간 내 머릿속엔 멋진 풍경 하나가 사진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단풍이 꽃보다 아름다운 요즘, 오색단풍의 화려함을 제치고 순결한 흰빛으로 피어나 향기로 가을 허공2019.10.23 13:39
계절 탓일까? 요즘은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을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하루가 다르게 붉어지는 감을 보아도, 서서히 황금색으로 물들어가는 은행나무 가로수를 보아도 어느새 생각은 지나간 시간을 더듬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가을을 두고 반추의 계절이라 했나 보다. 가을볕 아래 담벼락에 기대어 선 채 소슬하게 시들어가는 맨드라미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다름 아닌 '비 내리는 고모령'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 '찔레꽃'과 더불어 중장년층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로 가수 현인의 히트곡이다.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몇 해던가… " 노랫말 속에 맨드라미가 들어 있는 까닭도 있지만 군에서 철책근무 설 때 고2019.10.17 09:56
숲해설가 모임을 따라 계룡산에 다녀왔다. 단풍을 즐기기엔 아직 이르지만,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을 오르며 풀과 나무와 꽃을 볼 수 있어 행복한 산행이었다. 산을 오르기 위해 동학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을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일행 중 한 명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손을 뻗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손끝이 향한 곳에 꽃무릇이 한 송이 함초롬히 피어있었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받은 진홍의 꽃무릇은 멀리서 보아도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매혹적이었다. 꽃무릇하면 영광 불갑사나 용천사, 선운사 꽃무릇을 떠올리게 된다. 마치 붉은 페르시안 양탄자를 펼쳐놓은 듯 무리지어 피어 있는 모습은 황홀하기 그지2019.10.10 10:40
무심코 창문을 열었을 때였다. 석양에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맴을 도는 고추잠자리 떼가 보였다. 바야흐로 가을이 온 것이다. 봄을 느끼는 데 많은 꽃이 필요한 것이 아니듯 고추잠자리 떼만 보아도 가을을 느끼는 데엔 부족함이 없다. 바쁘게 살다 보면 계절이 오고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에 십상인데 이렇게 계절을 알아차리게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게 고맙기만 하다.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오늘의 연속이 도회지의 삶이지만 그래도 가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거나 지나치는 길가의 꽃들만 눈여겨봐도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요즘 자주 눈에 띄는 꽃 중에 유홍초가 있다. 선홍색의 작은 꽃이 초록의 넝쿨 위로 점점2019.10.03 06:00
어느 시인은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라고 했던가.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쪽빛 하늘을 바라보거나 석양에 물들어 한들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면 무작정 길을 떠나고 싶단 생각이 불쑥불쑥 찾아들곤 한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곧잘 자전거를 타고 중랑천으로 내닫곤 한다.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밟아 천변을 따라 달리며 새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잿빛 도시의 칙칙함을 버리고 다채로운 자연의 색감에 빠져든다. 그때마다 천변에 피어나는 꽃들은 새로운 색과 향기로 일상에 지친 나를 위로해준다. 어느새 중랑천의 둔치 꽃밭엔 화려한 색의 코스모스가 물결치고 있다. 연보라색 쑥부쟁이와 흰 구절초 같은 국화과의 꽃들이2019.09.25 11:43
이따금 찾아가는 집 근처 소공원 연못에 부레옥잠꽃이 한창이다. 산책하거나 아침운동을 나왔다가 부레옥잠꽃을 보면 어김없이 탄성을 지른다. 못가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꽃을 보거나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어댄다. 부레옥잠의 연보랏빛 고운 꽃잎이 이슬을 머금고 있는 모습은 절로 탄성을 자아낼 만큼 청초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여섯 갈래의 연보랏빛 고운 꽃잎 중 한가운데의 곧추선 꽃잎에는 짙은 보라색 줄무늬와 눈동자 같은 둥근 모양의 노란색의 큰 점은 마주보기 두려울 만큼 매혹적이다. 그 무늬가 봉황의 눈을 닮았다 해서 부레옥잠을 봉안련(鳳眼蓮)이라고도 부른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레옥잠은 줄기의 중2019.09.18 10:21
짧은 연휴의 마지막 날, 동네산책길에서 닥풀꽃을 만났다. 골목길을 돌아서는데 커다란 화분에 뿌리를 내리고 키가 껑충하게 자란 줄기 끝에 황미색의 커다란 꽃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뜻 보면 접시꽃을 닮은 닥풀꽃을 보는 순간, 몇 년 전 민화 배우던 때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그릴 때였다.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草蟲圖)는 꽃과 벌레 등 쉽게 볼 수 있는 소재들로 사군자나 산수화보다 좀 더 쉽게 친숙하고 대중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그림이다. 민화 선생은 그림본을 하나씩 나누어 주더니 그림 속의 꽃을 가리키며 촉규화라 했다. 아는 것이 병이랄까? 촉규화(蜀葵2019.09.11 08:03
한가위가 코앞이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 되면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느라 고속도로는 한동안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도로 위로 쏟아지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그리운 고향. 꽃 중에도 보기만 해도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꽃이 있다. 바로 박꽃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야 잘 모르겠지만 나처럼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박꽃을 보는 순간,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박꽃은 고향이 그리운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담스레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 시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소공원을 지나는데 어린이집 담장 위로 피어난 흰 박꽃 하2019.09.04 10:01
고향 후배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뒷마당 모퉁이에 하얗게 꽃을 피워 단 나무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름을 물었더니 두릅나무란다. 두릅나무도 꽃을 피운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면서 나는 그 나무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릴 적 나의 어머니는 봄이 되면 가시투성이 두릅나무 끝에 새순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여린 두릅 순을 따서 밥상에 올리시곤 하셨다. 살짝 데친 어린 순을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고 씹으면 입 안 가득 번지던 쌉쌀하면서도 달큰한 뒷맛이 단번에 입맛을 돌게 하던 두릅은 봄날 최고의 나물이었다. 두릅은 영양소가 풍부하여 ‘봄나물의 제왕’으로 불린다. 나무껍질은 당뇨병과 신장병의 약재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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