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0 06:30
행복 / 유치환―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2021.08.27 10:57
맨드라미와 나 / 김경미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다 흐린 날씨는 내가 좋아하는 날씨 좋아하면 두통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화단의 맨드라미는 더 심하다 온통 붉다 못해 검다 곧 서리 내리고 실내엔 생선 굽는 냄새 길에는 양말 장수 가득할 텐데 달력을 태우고 달걀을 깨고 커튼에 커튼을 덧대고 혀의 온도를 올리고 모든 화단들이 조용히 동굴을 닫을 텐데 어머니에게 전화한다 대개는 체한 탓이니 손톱 밑을 바늘로 따거나 그냥 울거라 성급한 체기나 화기에는 눈물이 약이다 바늘을 들고 맨드라미 곁에 간다 가을은 떠나고 오늘 밤 우리는 함께 울 것이다‘삼상(三上)’이라는 말이 있다. 구양수가 시문(詩文)을 생각하기 좋은 장소라고 한 마2021.08.20 08:26
저녁 풍경 너머 풍경 / 이병률 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가 황혼에 눈길을 주다보면 저 멀리 풍경이 강가에 다리 놓는 모습 보입니다 강 저편에서 강 이편으로, 강 이편에서 강 저편으로 서 로 각자의 기둥을 놓고 손을 내뻗는 모습에 무작정 속이 아리다가도 그 속도가 아름답기도 하고 장해 보이기도 하여 창자가 다 휘둘립니다 며칠에 한번쯤 통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神)은 자 꾸 자리를 만들고 허문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당신들도 지워졌으므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신 은 당신들의 장엄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당신도 목숨 걸고 자본주의 풍경이 되는 일을 합니까 한 풍경이 등짐을 지고 일 갔다 돌아옵니다 자꾸 먼 데를 보는 습관이 낸2021.08.13 08:31
그대 잘 가라 / 도종환 그대여 흘러 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 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 짓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2021.08.06 13:59
꽃 핀 오동나무 아래 / 조용미 꽃 핀 오동나무를 바라보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하다 하늘 가득 솟아 있는 연보랏빛 작은 종들이 내는 그 소릴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오동 꽃들이 내는 소리에 닿을 때마다 몸이 먼저 알고 저려온다 - 무슨 일이 있었나 내 몸이 가얏고로 누운 적이 있었던 걸까 등에 안쪽을 받치고 열두 줄 현을 홑이불 삼아 덮고 풍류방 어느 선비의 무릎 위에 놓여 자주 진양조로 흐느꼈던 것일까 - 늦가을 하늘 높은 어디쯤에서 내 상처인 열매를 새들에게 나누어 준 적도 있었나 마당 한켠 오동잎 그늘 아래서 한세상 외로이 꽃이 지고 피는 걸 바라보며 살다 간 은자이기도 했을까 - 다만 가슴이 뻐개어질 듯 퍼져 나가려2021.07.30 07:00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시는 나희덕(羅喜德, 192021.07.23 06:30
밤 편지―하동행 / 곽재구 늦은 밤 구례구역 앞을 흐르는 섬진강변을 걸었습니다 착한 산마을들이 소울음빛 꿈을 꾸는 동안 지리산 능선을 걸어 내려온 별들이 하동으로 가는 물길 위에 제 몸을 눕혔습니다 오랫동안 세상은 사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억압과 고통 또한 어두운 밤길과 같아서 날이 새면 봉숭아꽃 피는 마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 아직 스무 살 첫 입맞춤의 추억 잊지 않았습니다 폭염 아래 맨발로 걷고 또 걸어 눈부신 바다에 이르렀을 때 무릎 꺾고 뜨겁게 껴안은 당신의 숨소리 잊지 않았습니다. 책에 실린 그림에 올 여름도 마음을 빼앗겼다. 칠월, 늦은 밤이었다. 날은 중복이었다. 쉽게2021.07.16 07:00
꽃구경―따뜻한 봄날 / 김형영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길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큼씩 한 움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나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시는 우리가 시가 아니었다면 절대 볼 수 없던 것, 들을 수 없던 것, 만지고 느낄2021.07.09 06:30
아내에게 / 최하림 시간의 빗살들이 간단없이 흘러가던 성북역 철로변에 쑥니풀이 돋아나는 계절이면 고통의 씨앗들이 자라나 슬퍼지면서 우리는 언덕을 보았지 높고 둥근 언덕에서는 잡풀 향내가 코를 찌르고 가끔씩 파열음 섞인 아이들 함성이 하늘을 울리고 넘어가려 하는 햇살의 엷은 미소가 비친 이마에서 그림자들 넘실거렸지 나는 그 이마를 손등으로 쓸며 쉴 새 없이 입술을 댔다 손발을 가만히 쥐기도 했다 가을이 향기롭지요? 저기로 가봐요. 이리로 와봐요. 당신 손을 내 손에 얹어요. 우리는 손잡고 긴 길을 걸었지 긴 이야기했지 끊어지려 하는 현의 떨리처럼 삶은 아프겠지만 서로가 제 자신의 아픔을 아파하고 아파하는 마음2021.06.25 14:54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다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무심코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2021.06.18 11:35
회복기의 노래 / 한강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흔히 시인들은 시집 첫머리에 자신의 시적 지향이나 세계관을 함축적으로 담은 ‘서시’ 성격의 작품을 배치해두곤 한다.” 소설가 신경숙의 남편이자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그리고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왕성히 활동 중인 남진우(南眞祐, 1960~ )가 한 말이다.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서 보자면, 소설가이자 시인이고 작사가이면서 작곡가이기도 한 그. 한강(韓江, 1970~ )이 등단 20년 만에 펴낸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13년)2021.06.11 07:00
아이 라이크 쇼팽 / 이근화 시장 바구니에 커피 봉다리를 집어넣은 여자 빈 병에 커피를 채우고 커피물을 끓이는 여자 커피물이 끓을 동안 손톱을 깎는 여자 쇼팽을 들으면서 발톱마저 깍는 여자 커피물을 바닥내고 다시 물을 올리는 여자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물을 두 번 끓이는 여자 커피를 마시지 않는 저 여자 손톱을 깎으며 눈물을 보였던 여자 커피 한 봉다리로 장을 본 여자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던 여자 횡단보도 앞에 서서 오래 울었던 그 여자 빨리 건너지 않으면 더 오래 울게 될 거야 아직 건너지는 마 좀 더 울어야 되지 않겠어? 커피 봉다리를 들고 오래 울고 있었던 여자 이제 커피는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는 여자2021.06.04 08:35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꽃이 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