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4 08:34
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여름 산山 같은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져 휘어드는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더러는 앉고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2021.05.07 08:58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권대웅 하얀 싸리꽃이 밤새 대웅전 앞마당을 쓸고 있다 한 잎의 풀처럼 달빛에 움직이며 마당을 쓸고 있는 저 소리 고요하고 고요하여라 봄밤 댓돌과 마당을 지나 돌계단까지 하얗게 쓸어내고 있는 저 싸리꽃 빗질 소리를 듣다가 아! 비로자나불 싸리꽃이 절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을 피우며 피워내며 저 달에 새겨진 경(經)을 읽는 소리였구나 그래서 마당이 그토록 밝고 환했구나 꽃향기가 났구나시는 출판사(마음의숲) 대표이자 시인 권대웅(1962~)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문학동네, 2017년)에 보인다. 시집 제목이 그냥 좋았다. 그런데 그게 목차엔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어 뒤적2021.04.30 08:42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 이성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쌀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이 그림을 보면 한 편의 시가 놓이면서 과거의 치욕이 들린다. 아팠다. 시를 느릿느릿 줄을 따라서 손톱으로 강물을 슬쩍 만지듯 튕기자면 왈칵 눈물이 주르륵 쏟아질 것만 같다. 행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조용필의 노래 ‘창밖의 여자’(1978년 作)가 그림처럼 보였2021.04.23 11:15
유리창 앞에서 / 최하림 우리들 삶의 소란스러움은 거리와 시장 언저리에서 떠난다 그리고 그 시간의 어머니들의 머리는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요란스럽다 그리하여 밤으로 달려가고 있는 제 가정家庭의 슬픔을 벗어나려는 여인들이여 허리 구부린 여인들이여 나는 오늘 별들처럼 총총하고 싶어서 없는 유리창의 유리를 닦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단 한가지뿐이다. 여자의 몸을 껴안는다는 것,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신기한 기쁨의 빛을 자신의 몸에 껴안는 것이다.” 이 문장을 나는2021.04.16 08:47
백 년 / 이병률 백 년을 만날게요 십 년은 내가 다 줄게요 이십 년은 오로지 가늠할게요 삼십 년은 당신하고 다닐래요 사십 년은 당신을 위해 하늘을 살게요 오십 년은 그 하늘에 씨를 뿌릴게요 육십 년은 눈 녹여 술을 담글게요 칠십 년은 당신 이마에 자주 손을 올릴게요 팔십 년은 당신하고 눈이 멀게요 구십 년엔 나도 조금 아플게요 백 년 지나고 백 년을 한 번이라 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을 보낼게요 흙이 운동화 끝에 가만히 안기는 정원과 연녹색 나뭇잎 사이로 부는 바람이 경쾌한 낮은 언덕의 산책로. 미음완보(微吟緩步)를 즐길 수 있는 산책로가 옛집, 양반가옥 고택(古宅)을 두 팔로 휘감고 포근히 감싸준다.2021.04.09 14:54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2021.04.02 07:00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 김선우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우리는 훌륭한 현대 시인의 시라도 연달아 두 줄 이상 기억하지 못합니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꽃, 살구꽃이 만개한. 이 환장할 봄날! 방구석에서 독서하다, 이 구절에서 나 많이 반성했던가. 하여간 연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와들와들 떨었다. 선득한 말이다. 말하자면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프, 2021년)에 말이 보인다. 글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나는 서랍에 넣고 잊지 못했던 김선우(金宣佑, 1970~ ) 시인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