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5 07:06
아버지와 나와 아이들의 세상은 서로 다르다. 아버지가 살던 세상은 아날로그 일색이었지만, 나는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에 죽는 점에서 아버지와 다르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닌텐도’를 가지고 놀았으니 평생이 디지털 시대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아날로그 시대를 공유하고, 아이들과 디지털 시대를 공유하는 ‘낀’ 세대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의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세상은 1, 2, 4, 8, 16, 32, 64… 등비수열처럼 급경사의 곡선을 그리며 변하는데 비해, 사람은 1, 2, 3, 4, 5, 6, 7… 등차수열처럼 아주 천천히 완만한 경사의 직선을 그리며 변한다. 세상은 축지법으로 쉬지 않고 달리는데, 사람은 느릿느릿 그리고 쉬엄쉬엄 걷는다고나 할까?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기 힘들다보니 자연스럽게 세상과 사람 사이에 불균형이 커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세상이라는 회전목마가 돌고, 그 위에 사람이 앉아 있는 이분법적 구도다. 세상은 변해도 사람 자체는 불변한다는 전제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사람 자체가 변한다면? 이른바 포스트휴먼(posthuman)이나 트랜스휴먼(transhuman)이 된다면? 아마도 이분법적 구도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세상이 될 것이다. 포스트휴먼은 기본 능력이 현재의 사람을 넘어서는 존재를 가리키고, 트랜스휴먼은 현재의 사람과 포스트휴먼 사이의 과도기적인 사람을 나타낸다. 포스트휴먼은 첫째, 완전히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일 수 있고 둘째, 신체를 버리고 슈퍼컴퓨터 안의 정보 패턴으로 살기를 선택한 업로드의 형태일 수 있으며 셋째,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작은 개선들이 축적된 결과, 즉 인핸서(enhancer)일 수 있다. 인핸서의 경우에는 100% 생물학적인 존재일 수 있고, 생물학적 신체와 기계적 장치가 결합된 사이보그(cyborg)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이렇게 미래에는 사람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사람은 포스트휴먼이라는 새로운 종과 휴먼이라고 하는 보통사람으로 구분될 것이2016.09.28 07:31
2016년 9월 7일자 글로벌이코노믹 제26면에 실렸던 ‘먹고 산다는 의미 되짚어보기’에 대해 논리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께서 긴 이메일을 보내셨다. “사는 것만큼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논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산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이 대등하다는 주장의 논증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리고 “음식은 생명의 필요조건(먹어야 산다)일 뿐 생명의 충분조건(먹기만 하면 산다)이 아니기 때문에 음식과 생명을 대등하게 보는 것에 대해서는 재고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교수님과 직접 만나 긴 시간 토론하고 수학 전공 교수에게 자문한 후 먹고 산다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본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기, 물, 음식이 필수적이다. 흔히 말하는 333생존 법칙에 따르면 사람은 공기 없이는 3분, 물 없이는 3일, 음식 없이는 3주 정도 살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그중에서 우리가 숨 쉬고 사는 것은 공기가 있기 때문이고, 공기가 없으면 아주 빠르게 죽게 된다. 동물을 뜻하는 ‘animal’은 ‘생명, 숨, 공기’ 등의 뜻을 지닌 라틴어 ‘anima’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며 성경(창세기 2장 7절)에서도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했다. 숨 쉬며 사는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세우고 이것의 역, 이, 대우를 생각해보자. 다만 여기서 말하는 존재는 지구상의 사람과 동물, 특히 동면하지 않는 포유동물의 경우로 한정(동면하는 경우 호흡이 많이 줄기 때문)하기로 한다. 명제 “사는 존재는 숨 쉬는 존재다”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명제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명제의 역은 “숨 쉬는 존재는 사는 존재다” 이는 “살지 않는 존재는 숨 쉬지 않는 존재다”, 대우는 “숨 쉬지 않는 존재는 살지 않는 존재다”이고, 역, 이, 대우 모두 성립한다. 따라서 사는 것과 숨 쉬는 것은 대등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숨을 쉬고 있다. 숨이 멈추는 순간 우리 생명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2016.09.07 07:04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성경 구절은 삶에는 빵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빵이 삶의 부분집합이라는 의미다. 삶에는 먹는 것 이외에도 입는 것, 자는 것, 생각하는 것, 공부하는 것, 돈 버는 것 등 여러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성경 구절에서 나(예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빵이다. 다시 말해 나(예수)와 생명과 빵이 대등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이렇듯 빵은 삶의 부분집합이기도 하지만 삶과 대등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엄마 젖을 못 먹는 아기의 생명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속담에 ‘밥 한 알이 귀신 열을 쫓는다’고 한다. 귀신이 붙은 듯이 몸이 쇠약해졌을 때라도 충분히 먹는 것이 건강을 회복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말이다. 음식은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추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엄마 젖은 아기의 모든 것이 아니던가?이런 기회에 음식과 삶의 관계, 먹는 것과 사는 것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성싶다. 가까운 분의 장례식을 떠올려보자. 대부분의 유족들은 슬프고 경황이 없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그럴 때면 가까운 어른들이 이렇게 말씀하시곤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기운 차려. 아무리 힘들어도 먹어야지. 암, 그래야 살아가지.” 궁극적으로 먹는 것이 영양소의 섭취를 위한 것이라면 밥 대신 포도당 주사를 맞는 환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당연히’ 먹어야 산다. 이런 의미에서 ‘먹어야 산다’는 명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는 자명한 명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이 명제의 역은 ‘살려면 먹어야 한다.’ 이는 ‘안 먹으면 죽는다’, 대우는 ‘죽으면 안 먹는다’이고, 역, 이, 대우 모두 성립한다. 즉, 먹는 것은 사는 것의, 사는 것은 먹는 것의,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따라서 먹는 것과 사는 것, 음식과 생명이 대등한 관계인 것을 알 수 있다. 공기로 숨 쉬지 않고 살 수 없듯이 음식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법이다.우리말은 흔히 “먹고2016.08.24 08:46
설이나 추석 명절에 빠지지 않는 삼색 나물이 있다. 뿌리나물인 도라지는 조상을, 줄기나물인 고사리는 부모를, 잎나물인 시금치는 자식을 상징한다. 그런데 정작 셋 중에 가장 연로한 것은 고사리다. 고사리는 홀씨로 번식하는 민꽃식물로서 꽃식물인 도라지나 시금치보다 지구에 등장한 시기가 앞서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대선배인 고사리. 그 어린 순을 음식으로 먹다니…….모든 생명체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먹는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에 기대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뿐 아니라 후손의 생명도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해,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를 필요로 하며, 인간 역시 다른 생명체를 음식으로 먹는다. 하지만 어떤 생명체도 자신의 생명을 호락호락 내주지는 않는다.날쌘 토끼와 느려도 등껍데기가 단단한 거북이. 동물이 자기 생명을 방어하듯, 식물도 자기방어를 한다. 감자가 싹이 날 때 생기는 유독한 솔라닌(solanine)이나 마늘의 항균성 물질인 알리신(allicin)도 제 몸을 보호하는 물질이고, 고추의 매운맛 성분인 캡사이신(capsaicine)도 다른 해충이나 병균의 침입을 막는 물질이다. 자기방어 물질을 만들지 않는 식물은 없다. 고사리 역시 지구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바로 타퀼로사이드(ptaquiloside)라는 테르펜류(norsesquiterpene)의 배당체(glycoside) 때문이다. 배당체는 당류와 비당류가 결합한 물질을 가리키는데, 타퀼로사이드는 불안정하여 당이 분리되면서 다이에논(dienone)이라는 발암물질이 된다. 다행히 다이에논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쉽게 테로신 B(pterosin B)로 바뀌면서 발암성을 잃는다. 지혜로운 우리 조상들은 이런 사실을 경험으로 알았다. 그래서 고사리의 어린 순만을 따서 끓는 물에 데치고 오랜 시간 흐르는 물에 담근 후 조리하여 먹거나, 데쳐서 말린 고사리 순을 필요할 때마다 다시 끓여서 흐르는 물에 담가 불린 후 조리하여 먹었다. 이렇게 처리하면 수용성인 타퀼로사이드나 다2015.12.17 07:57
하필 무더운 여름에 결혼한 부부가 있었다. 신부 댁에서 정성스럽게 마련한 이바지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신혼부부는 아주 먼 지방도시의 신랑 댁으로 인사를 갔다. 일가친척이 다 모여 축하해 주었고 가져온 음식을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흥겨운 잔치가 벌어졌다. 아 그런데 그날 저녁 구토와 설사로 다들 난리가 났다. 식중독이 발생한 것이다. 원인은 이바지 음식으로 밝혀졌다. 오뉴월(음력으로 여름)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더니 인사하러 온 신혼부부가 손님이었을까? 축하해주러 모인 일가친척이 손님이었을까?식품위생법 2조(정의)에 의하면, ‘식중독’이란 식품 섭취로 인하여 유해한 미생물 또는 유독물질에 의하여 발생하는 감염성 또는 독소형 질환을 말한다. 그렇다면 분명 식품위생법의 정의에 꼭 들어맞는 식중독이다. 동법 4조(위해식품 등의 판매 등 금지)에서는 유독·유해물질이 들어 있거나 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오염된 것을 팔거나 팔기 위해 조리·운반 등을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더욱이 이를 위반하면 94조(벌칙)에 의거해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혼부부는 동법 4조와 94조에 적용되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바지 음식을 돈벌이로 파는 것은 아니었으니까.2015.11.04 07:33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느낀다. 같은 음식이라도 임신 중 입덧이 심할 때는 불쾌감과 고통을 느낀다. 모두 다 음식의 냄새, 맛, 색깔, 감촉 등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고소한 냄새, 담백한 맛, 과일의 예쁜 색깔, 졸깃한 감촉 등…. 한편 고향의 어머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를 먹고 나면 왜 그리도 마음이 푸근해지는지, 또 맛있게 먹는 자식을 보면서 어머니는 왜 그처럼 기뻐하시는지…. 이때 느끼는 것은 정신적 쾌락 또는 행복감이다. 이렇듯 쾌락에는 육체적 쾌락과 유쾌한 경험의 의미로서의 정신적 쾌락이 있다. 우리는 음식을 먹는 행위에서 두 가지 쾌락을 모두 얻을 수 있다.고대 그리스의 키레네학파는 육체적 쾌락을, 에피쿠로스학파는 정신적 쾌락을 중시했다. 키레네학파는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쾌락의 대부분은 결국 불쾌를 초래하기 때문에 쾌락을 잘 택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주의는 간소한 생활 속에서 영혼의 평화를 찾는 데 중점을 두었다. 공리주의는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의 두 가지 쾌락을 망라했으며 개인 윤리에 중점을 두었던 키레네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와 달리 사회 윤리로 윤리의 영역을 확장했다. 음식 윤리도 공리주의와 쾌락이라는 핵심 요소를 공유한다.2015.09.30 10:32
우리네 세상사 풍선을 많이도 닮았다. 한 쪽이 부풀면 한 쪽은 쪼그라드는 법. 도시가 부푼 만큼 농촌은 쪼그라들었고 농촌이 전담하던 음식에도 문제가 생겼다. 적은 수의 농업인이 수많은 도시인을 먹여 살리자니 농약과 비료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고 그만큼 생명과 건강은 더 위협받고 있다. 즉, ‘부메랑 효과’가 현실이 된 것이다. 우주처럼 계속 팽창하는 도시. 우주에서 보는 지구처럼 우리의 자연은 더 작아지고 멀어지는데, 과연 도시인인 내가 자연과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우리가 먹는 음식은 자연에서 오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 없이는 지속가능한 음식도 없고 인류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그래서 ‘음식 윤리’의 또 다른 핵심이 바로 ‘자연 보전’이고 이것은 ‘책임 윤리’에 해당한다. 책임 윤리는 자연을 윤리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요구한다. 마치 식중독의 의도가 없었더라도 식중독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듯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가장 못난 사람은 아마도 “내 배 째!”하며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도시농부는 적어도 도시인의 체면은 세워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닐까? 그래도 부정적이고 똑똑한 누군가는 “도시농부가 쪼가리 땅에서 뭘 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2015.08.12 14:00
음식점은 음식을 만들어 파는 곳이다. 손님이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음식 값을 지불하면 모든 게 오케이. “잘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네요.”하면 금상첨화. 잠 설치며 새벽시장 다녀온 보람도 있고. 어쨌든 사장님 기분은 급상승! 오늘 저녁은 매상도 급상승! “차라리 내년에는 건물을 사버려?”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다. “아참 그런데 점심때는 왜 그랬지? 그 손님 정말 최악이었어. 물 컵에 루주가 묻었다고 타박을 하더니, 국물 맛이 완전 MSG 맛이네 하면서 야단쳤었지. 무슨 큰 죄인인양 고개 숙여야 했잖아. 참 고약한 손님이었어.”이렇게 음식점 날씨는 예측하기 어렵다. 아침에 문을 열 때는 맑음이지만, 곧 흐렸다, 비 왔다, 갰다, 맑았다, 꼭 호랑이 장가가는 날 같다. 하루에 천둥, 번개, 가뭄, 태풍, 장마, 폭설, 춘하추동이 다 지나간다. 음식을 만들어 파는 일도 힘들지만, 손님을 잘 모시는 일은 더더욱 힘겹다. 이렇게 힘든 일을 음식점 사장님은 왜 하는 걸까?“아, 먹고 살려고 하죠. 음식을 만들어 팔면 손님이 돈을 내잖아요? 그 돈으로 자식들하고 함께 먹고 살죠. 다 이익이 있으니까 참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 음식점 사장님은 이익을 얻기 위해 그 힘든 일을 꾹 참고 견딘다.2015.07.02 10:41
식품학도는 식품학을 배우는 학생들이다. 식품학을 영어로 ‘시톨로지(sitology)’라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어에서 식품을 뜻하는 ‘시토스(sitos)’와 학문을 뜻하는 ‘로기아(logia)’를 합한 말이다. 시톨로지는 식사, 영양, 식품에 대한 학문(study of diet, nutrition, and food)을 뜻한다. 따라서 시톨로지 즉 식품학은 식사를 만드는 식품조리학, 영양을 다루는 식품영양학, 식품을 대규모로 만드는 식품공학의 세 가지 분야로 분화하면서 발달했다. 이 세 분야의 뿌리인 식품학의 테마는 바로 음식이다.이처럼 분화한 것의 예가 또 있다. 바로 관습과 윤리와 법이다. 동서양 모두 고대에는 관습과 윤리와 법이 분화되지 않은 규범으로 존재했으며 그 뿌리는 종교적 계율인 경우가 많았다. ‘황금률’도 종교적 관습이자, 윤리이자, 법이었다. 오늘날 관습과 윤리와 법은 충분히 분화하여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모두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규범이기 때문에 상호보완하면서 사회의 안전망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혹시 그 안전망에 구멍이 뚫린 것은 아닐까?식품학도들이 공통적으로 배우는 과목 중의 하나가 식품위생학이고 이와 직결된 법규가 식품위생법이다.1
리플 11% 급등, 0.43달러...리플 랩스, SEC 소송에서 보이저 디지털 판결 인용2
CPI 물가 "무려 10.4% 폭등" 제롬파월 FOMC "긴축 급선회" 뉴욕증시 비트코인 흔들3
2TV 저녁 생생정보 고수의부엌 꽃샤부샤부4
금양, 외국인 440억 순매수에 주가 급등…시총 100대 기업 '우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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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튬 관련주' 강원에너지 주가 3거래일 연속 상승7
시가총액 대비 공매도잔고금액 상위 30선(17일)8
비트코인 2만8000달러 횡보, 리플 22% 폭등 이더리움 2%↑1791달러9
퍼스트리퍼블릭 30% 폭등에 3대 지수↑…테슬라 7.8% 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