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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3)] 카모메 특수, 日女들 헬싱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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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3)] 카모메 특수, 日女들 헬싱키행

▲ 심플하면서도 기능적인 특징이 잘 살아있는 헬싱키 식당

6월 9~10일, 일본·독일인 관광객들 만나다
헬싱키에서는 더 이상 동양인 관광객이 낯설지 않다. 일본 여인들 때문이다.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2006)의 영향이 분명했다. 이 영화의 촬영지에는 영화 속 3명의 여인들처럼 혼자서 헬싱키로 찾아든 일본 여인들이 종종 눈에 띈다.

‘카모메 식당’은 헬싱키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사치에, 미도리, 마사코, 세 여인이 오니기리(주먹밥) 식당을 꾸려가면서 일어나는 일과 현지인들과의 교감을 다룬 소품이다. ‘헬싱키 관광 영화’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헬싱키가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카모메(일본어로 갈매기라는 뜻)라는 식당명 역시 헬싱키 하늘을 요란하게 끼룩거리며 날아다니는 통통한 갈매기에서 따왔다.

극중 마사코의 대사는 핀란드 관광 표어로 써도 될 정도다. 부모의 병수발을 하다 지쳐갈 무렵 우연히 핀란드에 관한 뉴스를 접하고 무조건 헬싱키로 날아왔다. 에어기타 세계선수권대회(실제 기타 없이 공중에서 기타를 치는 시늉을 하며 갖가지 퍼포먼스를 겨루는 대회), 아내 안고 멀리 달리기, 휴대폰 멀리 던지기 대회 등 엉뚱하고 우스운 짓을 하며 삶의 여유를 한껏 누리는 핀란드인이 부럽고 궁금해서다. 이에 대해 극중 핀란드 청년은 그 이유가 ‘숲’ 때문이라고 답한다.

나 역시 관광 첫날 평일 출근시간대인데도 여유가 철철 넘치는 헬싱키 시민들에게 감탄했다. 산책이라도 하듯 나무가 즐비한 거리를 슬슬 걸어 출근하거나 마켓시장(카우파토리) 천막카페 테이블에 앉아 크루아상과 커피 한 컵으로 아침을 먹는 드레스셔츠 차림의 직장인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핀란드 식당, 일본어 메뉴판

나도 ‘당장 헬싱키행 비행기표를 사고싶게 하는 영화’라는 평이 따라다니는 이 영화의 영향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9일에는 영화에 카모메식당으로 나오는 카하빌라 수오미(핀란드식당)에서, 10일에는 영화 속에서 사치에와 미도리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카페 알토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처럼 혼자 식사를 하고 사진을 찍어가는, 똑같은 패턴으로 관광하는 일본 여자들이 많았다.
두 곳 모두 현지인들도 들끓는 인기 식당이다. 따로 물어보지 않고 메뉴판만 봐도 일본인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곳 다 일본어 병행표기가 돼 있다. 나에게도 일본어 메뉴판을 원하느냐고 물어본다.

카하빌라 수오미는 영화에서와 달리 이름처럼 소박한 핀란드 음식을 판다. 인테리어도 영화에서와 다르다. ‘카모메식당’ 영화 포스터 만이 이곳이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영화에서는 핀란드의 국민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알바 알토(1898~1976)의 테이블과 의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음식점 주인 부부가 영화에 손님 역으로 찬조출연을 했다고 하는데, 사업이 무척 번창해서인지 카운터 일을 보고 서빙하는 직원들만 보였다. 젊은 일본인 남성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음식을 나르고 있었는데, 손님이 많아 어찌나 바쁜지 뭣 하나 물어보기도 힘들었다.

나는 비프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추운 나라답게 칼로리가 높은 재료를 썼다. 그럼에도 살찐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이 신기하다. 버터를 잔뜩 넣은 소스가 스테이크 위를 완전히 덮고 있다. 내 입맛에는 잘 맞았다. 다만 양이 너무 많아서 다 먹지 못해 나머지를 싸달라고 해서 숙소에서 데워 저녁으로 먹었다. 파리에서 헬싱키로 오는 핀에어에서 준 햄치즈 샌드위치는 어찌나 마요네즈 범벅인지 너무 느끼해서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핀란드 음식에 대한 평은 2005년 7월 외신이 유명하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가 해외 정상들과 만난 자리에서 “음식이 형편없는 나라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영국을 험담하면서 “핀란드 다음으로 영국이 음식이 형편없다”고 발언, 핀란드인들의 공분을 샀다고.

카페 알토는 영화 속과 똑같았다. 사치에는 식당을 열고나서 찾아온 첫 손님인 ‘일본 애니 마니아’ 핀란드 청년이 물어본 ‘갓차맨(독수리 오형제)’ 주제가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헤매다가, 카페 알토에서 일본어로 된 책을 보고 있는 미도리에게 가사를 물어보게 된다. 미도리가 읽고 있던 책은 ‘무민 골짜기의 여름’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핀란드 동화작가이지 삽화가인 토베 얀손(Tove Jansson)의 작품. 이웃 일본에서만 해도 굉장히 인기있는 캐릭터인데 한국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카페 알토는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공간이라고 한다. 심플하면서도 기능적인 특징이 잘 살아있다. 헬싱키 내에서 가장 큰 서점이라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아카데미넨 서점 2층에 있다. 지하 1층에서 각종 문구류와 디자인 상품, 1~3층에서 책을 팔고 있는데 인구가 많지 않은 만큼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을 연상하면 곤란하다. 하마같이 생긴 요정인 무민트롤을 주인공으로 한 동화인 무민 시리즈는 1층 동화 코너에서 팔고 있었는데, 금발미인인 서점 직원에게 문의하자 친절한 설명이 뒤따른다. 핀란드어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프랑스어 등 각종 유럽 언어들로 번역된 무민 동화책을 팔고 있다고 한다.

무민은 아니지만 일본어와 중국어 책도 있다. 중국 간자체로 된 책은 핀란드 전래동화라고 한다. 서점 직원은 아시아 언어를 몰라 내가 일본어와 중국어라고 가르쳐주고, 요즘 여기 일본인들이 많이 오는 이유가 여기서 일본 영화가 촬영됐기 때문이라고 얘기해주자 그런 사실을 몰랐었다며 감탄한다. 나는 한국인이라고 하자, 아마 한국어 책도 있을거라고 했지만 찾아봐도 한국어로 된 책은 없었다.

◇70대 독일 여인, 여행 묘미 귀띔

듣기로는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민족이 독일인이라고 한다. 특히 북유럽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어 이쪽으로도 관광을 많이 온다고 한다. ‘함메르페스트로 가는 길’이라는 타이틀로 국내 번역된 핀란드 작가의 청소년 소설에서도 그에 대한 얘기를 본 적이 있다.

중국이 개방되면서 요즘은 엄청난 인구의 중국인들이 여행을 많이 다니지만 아시아에서는 일본인들이 해외에 많이 나다니기로 유명했다. 그저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워낙 침략야욕이 있었던 민족들인지라 평화의 시대에는 그 여파를 여행으로 풀고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안 그래도 파리발 헬싱키행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독일 남자였다. 3명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자리의 창가 쪽에는 중국계 아니면 베트남계로 보이는 남성이 앉았고 통로 쪽이 내 자리였는데, 그 사이에 끼어 앉게 된 게 스킨헤드에 귀를 잔뜩 뚫은 독일인이었다. 음료를 건네주는 스튜어디스에게 ‘당케’라고 인사하는 것을 듣고 독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스타일을 보아하니 인종차별주의자, 극우 신나치주의자가 아닌가 싶다. 동양인들 사이에 껴앉게 된 게 영 못마땅한지 자기 자리에 소지품을 휙 던져놓더니 두어 시간 비행 내내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고 있다.

내가 묵는 에로타얀푸이스토 호스텔 13호실은 여성전용 6인실이다. 이 방의 방장 노릇을 하는 이도 알고보니 독일인이다. 키와 체구가 상당히 커 침대가 작아 보이는 나이 많은 백인 여성은 내가 시차 때문에 새벽부터 깨서 지연 도착해 뒤늦게 받게 된 캐리어를 정리하자, 다들 자고 있는데 시끄럽게 뭣하는 짓이냐고 야단을 쳐 첫날부터 내 마음을 잔뜩 오그라들게 했다.

밤 10시부터 잠자리에 들어서 일어날 시간이 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는 오전 8시까지는 자야한단다. 그 다음날도 오전 9시가 되도록 일어나지를 못했다. 왜이리 잠이 많나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70대에 들어선 노인이었다. 젊게 살아서 그런지 훨씬 젊어보였는데 그 나이에 혼자서 여행을 다니려니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잠투정도 이해가 됐다.

독일 뮌헨(독일어 발음으로는 뮈니크)에서 왔다는 하이드(Heather, 영어이름 헤더로 야생꽃 이름이라고 한다)는 차차 얘기를 나누다보니 엄청 친절하고 쾌활한 사람이다. 그의 여행스타일도 굉장히 자유로웠다. 유명 관광스폿을 따라 남들 가는대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발길 닿는대로 걸어 다니면서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헬싱키에 와서도 트램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1번 트램의 북쪽 종착역인 카플라(Kapyla)라는 주거지역이 정말 좋았다고 추천해준다. 핀란드 전통 나무 가옥들이 그득하고, 그 아래쪽에는 젊은이들이 사는 대안 주거지역이 새롭게 생긴 것 같다며….

나는 저널리스트로 당신의 얘기를 내 연재에 쓰고 싶다고 하니, 자신도 저널리스트가 꿈이라 저널리즘 스쿨에 가고 싶었는데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포기했다고 한다. 아들딸이 40대 초반인 그녀는 간호학을 가르치다가 10년 전 60대에 들어서 이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시작했다며 정말정말 좋았다고 한다. 멕시코에서 3개월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에 멕시코를 포함한 남미에서 6개월을 보냈고, 중국도 3개월간이나 여행했고, 작년에는 베트남에 갔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중국인들은 가난해서 길거리에 자면서도 엄청 친절하고 오픈마인드를 가지고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시켰고, 아침이면 공원에 모여 체조를 하고 이것저것 즐기는 것도 멋있었다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다. 베트남인들은 불친절하고 자신에게 뭔가 뜯어내려는 듯이 보였다며 싫어했다. 베트남인들은 지금 경제발전기에 있기 때문에 각박할 거라고 설명은 해줬다.

내게 웬 짐이 그리 많냐고 타박하면서 옷은 매일 빨아서 입으면 되므로 자기는 작은 배낭 하나만 가지고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사실 나도 장기 여행에서 짐이 걱정이었다. 각종 화장품과 세면도구까지 도시가 아닌 시골, 오지로 올라가면서 필요한 것들이라고 싸짊어지고 왔는데 좀 더 버리는 연습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좁게 나눠쓰는 6인실 방에서 나혼자만 잔뜩 짐들을 늘어놓은 것 같아 민망하다. 싸온 물건을 찾기 위해 짐을 풀어 헤트렸다 정리하기를 반복하면서도 아직까지는 뭘 버려야할지 알 수가 없다.

가방에서 샘플 몇 개만 꺼내놓고 간단하게 샤워하고 선블록만 바르기로 했다. 세탁기도 건조기도 없는데 빨랫거리를 자꾸 만들 수 없다. 수건도 한 장으로 며칠씩 써야한다. 여행에서는 집에 있을 때와 달리 포기해야할 것들이 많다. 일단 옷과 속옷을 매일 갈아입는 것도 포기하고 얼굴에 이것저것 발라 화장을 하는 것도 포기하고 나니 한국에서는 뭘 그리 까탈스럽게 굴고, 위생을 따지고 깔끔한 척을 잔뜩 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여행자로서의 체질개선이다.

어찌 보면 이런 사소한 것들을 포기하고 얻는 것들이 더 많으리라고 기대해본다. 멀리서 더 넓게 보면 중요하게 여기던 일도 작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 인생에서도 너무 많은 짐을 이고 가다보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진리도. 자유롭기 위해서는 더 가벼워야한다는 진리도.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