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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6)] 창도 200년 헬싱키, 들썩들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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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6)] 창도 200년 헬싱키, 들썩들썩

6월12일 헬싱키데이, 자전거로 누비다

6월12일은 헬싱키데이(http://www.helsinkiviikko.fi/en/helsinki-day-126), 투르쿠에서 헬싱키로 수도를 옮겨온 날을 기념한다. 올해 200주년을 맞아 특히 성대한 행사가 벌어진다는 소식을 헬싱키시 홍보관(Casper Almqvist)에서 입수했다. 그가 보내준 상세한 스케줄을 참고해 하루를 바삐 보냈다. 여느 날보다 관광객도 많았고 무료 행사가 줄줄이 있었다. 공용 수영장도 무료 개방되고, 무료 팝업 사우나도 설치된다.
물어보니 이날은 휴일은 아니란다. 헬싱키 시민들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자전거를 타고 바삐 출근들을 하는 틈을 뚫고 시청 쪽으로 향했다. 시내 곳곳에서 열리는 행사에 다 참여할 순 없겠지만 전날 밤 미리 지도를 보고 루트를 짜놨다. 이제 좀 헬싱키 중심가는 어디가 어딘지 알 것 같다. 그래도 취재에는 난관이 너무 많다. 핀란드어 밑에 스웨덴어만 병행해놨지, 영어 안내가 있는 곳이 거의 없는 데다가 핀란드어 사전지식 없이 핀란드어 단어의 발음을 알아듣기도 너무 힘들다. 시간개념도 현저히 다른 것 같다. 한국인은 ‘빨리빨리’에 익숙해져있고, 나는 특히 인터넷으로 실시간으로 마감하는데 익숙해져있기에 뭐든지 초스피드로 해결해야한다. 대체 무조건 기다리라고 하고, 급한 상황을 봐주는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친절하고 영어를 잘하는 헬싱키 시민들 덕분에 물어물어 찾아다니기에는 무리가 없다. (핀란드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정도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상세한 취재가 필요할 때는 통역자가 없으니 확실히 어렵다. 양쪽 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상황에서 하는 대화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피곤하고 지칠 때는 영어가 더 안 된다는 사실….)

처음에는 소극적인 핀란드인들이 불친절하다고 오해할 수 있다. 낯선 동양여자가 홀로 헤매고 있는 것 같아도 먼저 말을 걸어주는 이는 하루에 한 명이나 있을까. 어쩌다가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간접적으로 물어보는 이가 있어도,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다. “어디서 왔느냐”고 대놓고 물어보는 이는 거의 없다.

무시당하는 것 같아 서운한 감정도 있었는데 며칠 있다 보니 먼저 아는 척을 하거나 정도가 넘는 질문은 실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걸 알 수 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지나가는 이를 잡고 말을 시키면 하나 같이 환하게 웃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려고 애쓰는 이가 대다수다. 특히 할머니들의 배려심과 친절은 감동적이다.

11일 만난 헬싱키대 김정영 교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핀란드 학생들의 조용함에 답답할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한국 학생들 질문 없다고 하지만 그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이곳에 온 지 10여년이 지나 세대가 바뀌면서 많이들 달라졌지만 정말 말이 없다고 한다. 하다못해 이런 우스개도 있단다. 형이 동생을 초대해 식사를 하는데, 동생이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너는 여기 밥먹으러 온거냐, 얘기하러 온거냐”며 타박을 했다나.

▲ 6월12일은 헬싱키데이, 투르쿠에서 헬싱키로 수도를 옮겨온 날을 기념한다.
◇오전 9시. 시장의 헬싱키데이 선포

오전 9시에 헬싱키 시청과 좁은 골목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시립미술관 2층 발코니에서 요시 바유넨(Jussi Pajunen) 시장이 헬싱키데이 선포식을 할 예정. 현지 인터넷매체(www.kunta.tv)에서 영상 촬영을 나온 손야(Sonja)가 미리 자리 잡고 있는 계단 위에 나도 자리를 잡으니,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일찍부터 와 기다리고 있는 이들 중에는 핀란드 전통복장을 한 할머니 두 분도 계신다. 장미 무늬 스카프에 모자를 쓰고, 예쁜 자수가 놓여진 주머니가 달린 치마를 입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밝게 웃어주신다.

검은 슈트 차림새의 합창단 축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백발에 자그마한 체구의 시장 등장. 시장의 핀란드어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시청 앞마당에서 커피 마시고 가라”는 한 마디만은 영어로 하기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손야에게 그 얘기를 하니 “나중에 시장이 내려와 합창단하고 얘기하는 거 봤지, 단원들이 ‘커피, 커피’ 노래를 부르는데 얼마나 웃겼는줄 아느냐”고 한다.

◇오전 9시15분. 시청 마당에서 공짜 커피와 대황파이

헬싱키데이에는 전통적으로 시청 마당에서 시민들에게 공짜로 커피와 대황파이(rhubarb pie)를 나눠준다고 한다. 시립미술관 맞은 편 입구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는데, 미술관에서 ‘핀란드 영화의 디자인‘ 전시의 의상, 커튼 등을 관람하고 내려갔는데도 꼬리에 꼬리를 문 줄은 줄어들 줄 모른다. 취재를 빙자해 겨우 껴들어 작은 대황파이 한 조각을 얻어먹는데 성공했다. 붉은 잼이 들어있는 파이는 정말 달콤했다.

◇오전 10시. 시청 갤러리에서 어린이 행사

이날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시청 갤러리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30분까지 여러 공연이 있는데, 가장 먼저 하는 공연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다. 어린이를 가장 먼저 배려하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인솔교사를 따라서 단체로 온 아이들은 하나같이 형광색 조끼를 입고 있다. 공사장 인부들이나 청소원들이 입는 바로 그 야광 조끼다.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인 듯싶다. 따라하는 건 어떨까.

부모가 데리고 나온 더 어린아이들도 많이 보이는데, 젊은 아버지들이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온 모습도 흔하다. 여성가수 3명이 화려한 복장으로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고개를 쳐들고 꼼짝 않고 홀린 듯이 바라보는 것이 정말 귀엽다.

로비에서는 헬싱키에서 200년 동안 있었던 주요한 사건들을 도표로 정리해 전시 중인데, 1930년대 헬싱키를 침략한 독일군들의 흑백 사진이 인상적이다.

◇오전 11시. 도서관에서의 헬싱키 수채화전

리크하딘카투 도서관(Rikhardinkatu Library)에서 헬싱키를 그린 수채화전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 소품 26점을 책장들 사이에 걸어놓고 판매 중이다. 큰 전시를 기대했다가 좀 실망하긴 했는데, 북유럽의 소박하고 절제된 건축물과 수채화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 부지런히 움직여서 오전 11시에 뮤직센터에서 있는 무료 연주회에 가려고 했는데, 눈을 사로잡는 것들이 너무 많아 아쉽게도 입장을 하지 못했다.

시청 앞 마켓광장에서 파는 소품들에 이어 파리 샹젤리제 거리 같은 에스플라나디 공원을 중심으로 양쪽 거리에 눈을 뺐기다 보니 늦어진 것. 각종 핀란드 유명 디자인 제품들은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소위 명품 브랜드가 가지는 속물성이 없다. 특히 가구점 아르테크(Artek)에서 박물관에 전시돼 있을 만큼 유명한 의자들에 시험 삼아 앉아보기 시작하면 그 편안함에 늘어지게 된다. (핀란드의 디자인 프라이드는 이런 것이 아닐까. 정말 꼭 가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다.)

걸어가다 보니 ‘멋진 모자 행진’ 대열도 만나게 된다. 헬싱키데이에 맞춰 자신이 가진 가장 멋진 옷과 예쁜 모자를 쓰고 무리를 지어 시내 여기저기를 걸어다니는데 이것도 큰 구경거리다.

뮤직센터 연주회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다행히 다음 취재 목적지인 ‘바나(BAANA)’ 거리의 입구를 찾았다. 바나는 헬싱키데이를 맞아 개통식을 한다. 뮤직센터로 가는 쪽인 키아즈마 미술관 인근에 북동쪽 입구가 있었다. 바나는 헬싱키 중심부인 북동쪽에서 동서쪽 항구지역을 잇는 1.3㎞의 보행자와 자전거를 위한 거리다. 평균 15m 폭의 콘크리트로 이뤄져있다. 중간중간 시내 주요거리를 잇는 계단과 벤치 등의 휴식공간이 있는 것도 서울의 청계천과 비교할 수 있겠는데, 물론 개천이 흐르는 건 아니다. 헬싱키 지층의 암석들이 드러나 있긴 하다.

그린 환경도시를 위한 시 정책의 하나로 나무와 덤불, 꽃 등과 함께 꾸몄다. 400만~500만 유로를 들여 만들었다고 한다. (http://www.finlandiapuisto.fi/media/video/baana.html 바나를 미리 체험해볼 수 있는 영상)

◇오후 1시 부시장의 바나 개통식 테이프 커팅

바나 개통식은 내가 있는 곳과 반대쪽인 동서쪽 끝부분에서 열린다. 북동쪽 입구에서 설렁설렁 걸어가도 20분이면 도착한다. 현지인 거주지역에 잘 가꿔진 잔디밭에 드러눕다시피하고 행사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인도계 남성 한 명이 지나가다가 멈춰 “여기서 25년 살았는데, 이 동네에서 동양인 보기는 처음”이라며 “어디서 왔느냐, 일본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오후 1시가 가까워질수록 온갖 자전거를 탄 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분명 공휴일이 아니라는데도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지 모르겠다. 관광객, 특히 동양인은 나 딱 한 명인 것 같다. 하긴 이런 현지인 행사를 관광객이 알 리 만무다.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자전거 향연이다. 각종 조화로 장식한 일반 자전거부터 시작해 바이맥스, 눕은 듯한 자세로 타는 리컴벤트(recumbent bicycle) 등 다양하다. 운반용 부대장치들도 볼거리다. 자전거택시도 보였고, 아이들을 태울 수 있는 천막 유모차, 앞쪽에 매달 수 있는 커다란 박스 등등. 우리나라에서도 자전거도로를 늘려가고 있는 상황인데, 자전거인구가 더욱 늘어난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다.

경찰관들도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경찰 자전거 두 대를 일정 거리를 두고 세워놓고 핀란드 국기를 상징하는 희고 푸른 테이프를 매달아 준비를 해놓는다.

드디어 1시가 되자 몇 명의 남성들이 연달아 연설을 하는데, 여기서도 난관에 봉착했다.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는 것.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이가 페카 사우리(Pekka Sauri) 부시장이라고 한다. 굉장히 인상이 좋아보이는 남자인데 청바지에 검은색 면 후드재킷의 캐주얼한 차림새라 부시장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옆에 서있는 할머니 사이클러에서 물어봐서 알았다.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 그가 등장하자 군중이 일제히 자전거 경적을 울리는데, 굉장히 청명한 벨소리가 난다. 한국식의 격식을 잔뜩 갖춘 행사만 생각하다가 격의없이 시민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굉장히 자유롭고 여유가 넘친다는 생각이 든다.

순서대로 4명이 나오는데 할머니 사이클러는 회색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이탈리아에서 오래 산 유명작가라고 잔뜩 설명을 해주신다. 여동생도 역시 유명작가라고 하는데 이름을 들어야 알 수가 없다.

이어 리본 커팅. 부시장이 준비된 가위로 리본을 자른다. 부시장에 이어 남색 재킷을 입은 남자에게는 직접 가서 이름을 물어봤다. Ville Alatyppö씨. 거리와 공원 부서의 책임자를 맡고 있다고 한다. 이어 나이든 시민 몇 명도 와서 테이프 커팅을 하는데, 재밌는 것은 이들은 커팅한 천조각을 보관하기 위해 가져간다.

커팅이 끝나자 리본이 매달려있던 자전거를 탄 경찰관이 선두에 서고 적어도 1000명은 될 듯한 자전거를 탄 시민들이 차례로 그 뒤를 따라 바나 거리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오후 2시. 캄피 자전거센터 개장, 무료 체험

바나와 연계돼 시외버스 역이 있는 캄피 지역에 자전거센터가 개장했다. 자전거 대여소는 몇 년 전 사라졌다가 재개장했다고 한다. 캄피 쇼핑센터 앞 나린카(Narinkka) 광장은 각종 자전거 관련 행사로 북적북적댄다. 반대쪽 시립미술관에서는 자전거를 이용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자전거센터를 기웃대고 있으니 친절한 미녀 한 명이 오늘은 개장날이라 무료로 자전거를 대여해준다고 안내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여는데 신분증을 맡겨야한다. 여권을 내주고 하늘색 새 자전거와 헬멧을 받았다. 낯설어하는 나를 위해 직원은 내 짐가방을 자전거 뒤에 고정시켜주고 헬멧을 씌워주고 운전 방법부터 잠금장치 사용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자전거를 타는 건 중학생 시절 이후 한 25년만인가 싶다. 처음 올라타니 중심이 잘 안 잡혀 비틀비틀 대니 이 아저씨 직원은 영 못미더운지 “제발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한다.

애초 목적지는 툴로날티(Töölönlahti)였다. 헬싱키 북쪽 내륙으로 파고든 바다 주변 지역이다. 지도에서 보면 호수처럼 보이는데 바다가 깊숙히 땅 안쪽으로 들어와 해변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이 지역 별장들에서 갖가지 문화행사도 있고, 특히 팝업 사우나가 있다는 것이다.

자전거도로를 잘 따라가면 이곳이 나온다는데 낯선 길을 힙겹게 가다 보니 어느새 올림픽 스타디움까지 올라가게 됐다. 마침 올해가 1952 헬싱키올림픽 6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니, 예정하진 않았지만 스타디움 구경도 하고 주차장 앞의 올림픽스 카페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오후 4시. 해변의 팝업 사우나와 별장지대

툴로날티 공원지대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여우비처럼 잠시 내리는 비는 양이 많지는 않다. 급변하는 헬싱키 날씨에 며칠 만에 익숙해지긴 했는데, 너무 변덕스러운건 사실이다. 햇볕이 쨍쨍하다가도 금방 한 차례 비가 쏟아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아진다. 겉옷을 입었다 벗었다, 방수 재킷을 걸쳤다 벗었다를 수시로 반복해야한다.

팝업 사우나란 몽골리안들이 쓰는 것 같은 임시 천막에 사우나를 꾸며놓은 것이다. 천막카페를 차려놓고 음료대접도 한다. 옆에 장작을 잔뜩 쌓아놓았는데, 그 장작으로 불을 때나보다. 이 사우나는 헬싱키데이를 맞아 12~14일 열리는데, 3~8시 시간대마다 남녀가 교대로 이용한다. 내가 도착한 시간에는 남성들이 이용하는 시간대라며 내부 구경이라도 하려면 여자 시간대에 오란다. 막 여자시간대 사우나를 마치고 나온 여인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몸을 식히려 바다에 뛰어들고 있다.

반대편 해변가로 이동하니 목조가옥촌이다. ‘푸른집’으로 불리는 곳은 갤러리로 작은 조각상과 그림들을 전시해 팔고 있다. 바로 옆의 하얀집은 핀란드 유명작가의 집이라고 한다. 중고책들을 잔뜩 팔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현지인들의 문화애호다. 작은 집들이 미어터질 정도로 미술작품과 헌책을 구입하려는 이들로 바글거렸다. 인구밀도가 낮은 헬싱키에서 이렇게 사람들이 가까이 붙어있는 건 처음 본 듯하다.

아름다운 목조가옥들과 해변을 따라있는 울창한 숲을 자전거로 달리는 일이 꿈만 같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것이 여행자의 숙명이다. 오후 6시가 되기 전에 자전거를 반납하고 여권을 찾아야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내일 아침 기차로 투르쿠로 이동할 예정인데, 여권을 못찾게 되면 대책이 없다. 오늘 걸어서 한 번, 센터로 돌아가는 길에 자전거를 타고 한 번, 바나 개통식날 바나를 완전 마스터하게 됐다. 여권을 받아들고 나니 갑자기 피로감과 졸음이 몰려온다.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