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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10)] 밤기차 그리고 새벽거리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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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10)] 밤기차 그리고 새벽거리 질주

6월 15~16일① 로바니에미에 2명뿐인 교민자매

기차의 침대칸은 처음 타보는 것이다. 이런 경험 해보지 않았면 후회할거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다. (관용구이지만 어폐가 있는 것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어떻게 후회한단 말인지…) 6월14일 오후 9시5분에 투르쿠를 출발해 다음날 오전 10시40분에 로바니에미에 도착하는 차다.
다른 나라의 침대차를 타보지 않아서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참 좁은 공간을 잘 활용한 디자인이 좋다. 핀란드에 와서 느낀 것이 의자, 쓰레기통 등 사소한 것들의 위치가 참 ‘인간 친화적’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행동을 연구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기능적 배치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짐 좀 내려놓고 앉고 싶어지는 지점쯤에는 벤치가 보이고, 들고 있는 음료수병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는 쓰레기통이 딱 보이는 것. 기차 안에서도 그냥 몸이 느끼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경험하는 것 하나하나가 다 놀랍기만 하다.

유레일패스를 가지고 있어도 좌석이나 침대를 예약할 때 약간의 비용을 내야한다. 2층침대로 된 2인실, 3층침대로 된 3인실이 있는데 3인실 가격이 13 유로로 가장 저렴해 그걸 예약해봤다. 목이 꺾어지는 줄 알았지만, 정말 편안하게 잘 잤다. 다른 방을 들여다보니 2인실은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을 정도의 높이지만 3인실은 겨우 누워있을 수 있는 공간 높이다. 하지만 요람처럼 약간 흔들리며 안정적으로 이동하는 기차 내에서 불을 끄고 커튼을 치니 굴속에서 자는 것처럼 안정감이 느껴진다. 백야 때문에 빛을 완전히 차단하는 두꺼운 커튼은 필수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잠이 들어 오전 6시께까지 화장실 한 번 다녀온 것을 빼고는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프랑스에서 왔다는 로렌과 로바니에미에 산다는 베라는 친구사이로 같은 칸에서 자게 됐다. 화끈거리는 얼굴에 팩을 하나 붙이려다가, 하나씩 나눠주니 베라는 팩 포장지에 쓰인 글이 한글이냐고 물어보며 좋아한다. 나의 자리는 가장 아래쪽이라 그들이 아침에 늦잠을 자는 동안 바닥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

기차는 30여분 연착했다. 여전히 엄청난 크기의 짐을 끌고 내리려는데 로렌이 “좀 도와줄까, 혼자 갈 수 있겠니”하며 연신 걱정을 한다. “한국인 가이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고 하고 그녀들을 먼저 보냈는데, 무뚝뚝한 핀란드인들만 겪다가 로렌의 살가운 말들을 들으니 마음이 무척 따뜻해진다. 핀란드인들은 수줍음이 많아 처음 사귀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한 번 사귀고 나면 평생을 간다고는 하지만 그러기에 내가 여기서 느끼는 외로움은 크다.


◇로바니에미에서 한국을 알리는 자매

로바니에미 관광청에 문의했더니, 한국인 가이드 김미경(35)씨를 주선해줬다. ‘산타마을’ 로바니에미, 한국에서 엄청나게 멀게 느껴지는 동화 속 나라 같은 곳에 한국인이 살고 있다니 그 사연이 무척 궁금했다. 유럽에서 면적상으로는 가장 큰 도시라는 로바니에미에는 6만여명이 살고 있는데, 그중 딱 2명뿐인 한국인이다.

김미경씨는 ‘핀란드 산타마을 로바니에미’라는 블로그로 잘 알려진 김정선(40)씨의 동생이다. 한국에 잠시 나와 일했던 핀란드인과 결혼해 2004년부터 로바니에미에 살고 있는 언니를 따라 2006년 이곳으로 유학와 정착했단다. 이곳 대학에서 국제경영학을 전공한 후 재작년 핀코(www.finnko.com)라는 여행 컨설팅 회사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언니 김정선씨는 산타우체국에서 6년간 ‘서니 엘프(엘프는 요정이라는 뜻)’로 일했다.

이들 자매 덕분에 로바니에미 관광청에서는 한국 시장에 큰 관심을 갖게 됐고, 홈페이지에는 한국어 안내까지 생겼다. 산타우체국에 한국어로 된 산타할아버지의 공식편지와 각종 안내자료가 생긴 것도 이들 덕분이다.

앞으로 지속될 북극권 여행의 전진기지 같은 이곳에서 이들 자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고, 응급약들도 받아 챙기고 세탁기와 건조기까지 빌려 썼다. (이번 여행을 떠난 후 첫 빨래를 하려고 했는데 관광지임에도 주말에는 빨래방도 문을 닫는다. 확실히 돈벌이보다 인생을 즐기는 것이 이들에게는 중요한 듯 싶었다) 그나마 북유럽 4개국중 핀란드가 가장 물가가 싼 편이라, 이곳에서 여행을 하다보니 필요한 물품을 사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카메라 배터리, 휴대폰 케이블 등은 한국보다 2배 내지 몇배의 가격은 되는 것 같다.

15일에는 학생 아파트에 사는 김미경씨의 집, 16일에는 핀란드인 남편과 사는 김정선씨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 현지인들의 생활을 잠시 엿볼 수도 있었다. 그림 속 같은 찬란한 자연의 축복 하에 각종 복지혜택과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이들이 부러웠다.

핀란드는 유학생들에까지 학비가 면제되는 데다가 대학생들에게까지 교통비 할인이 되는 등 각종 혜택을 베푼단다. 대학 졸업 후 2년까지 시세의 반값만 내면 살 수 있는 아파트에 머물 수 있어 그동안 이곳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단다. 이민자들에게는 핀란드어 교육이 무료일 뿐 아니라 약간의 생활비까지 보조해준다고 한다.

김정선씨의 집은 평범한 중산층 아파트였는데 나무 바닥을 깐 널찍한 테라스는 전면이 유리로 막혀있어 숨막히게 아름다운 바깥 풍경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었다. 핀란드의 현지어 국가명은 수오미. 늪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온 이름이라는데 조금만 걸어나가면 강과 호수지대다. 요즘 오후시간대의 온도는 영상 22도 정도로 바람이 불지 않아 더 따뜻하게 느껴지고 잔잔한 호수는 푸른 하늘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인테리어는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나무로 짐을 얹어놓거나 앉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들고 온 가방이나 무거운 겉옷, 짐같은 곳을 내려놓을 곳이 필요한데 이를 배려한 것이다. 인간의 동선과 필요를 파악한 공간 배치에 보는 것마다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집집마다 사우나가 있다더니 나무 의자가 갖춰진 널찍한 사우나도 갖추고 있었다. 국민 대부분이 별장이 있다는데 도심에서 30㎞쯤 떨어진 곳에 오두막이 있어 여름에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단다. 절대빈곤과 노후를 걱정 안 해도 되니 실업기간 중에도 여행을 다니고 겨울이면 스케이트와 스키 등을 즐기는 여유로운 생활을 한다.

재밌는 것은 아파트 지하마다 공용 세탁실이 있어서 예약만 하면 돌아가며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람이 나와 빨래를 말려주는 거대한 건조기도 인상적이었다.

◇인적없는 새벽거리, 미친 듯 질주하다

내가 묵는 숙소는 산타클로스 호텔에서 운영하는 루돌프 호스텔. 이름부터 예뻐서 맘에 든다. 뭐 건물이나 인테리어까지 기대처럼 낭만적이고 예쁜 것은 아니지만 김미경씨의 말로는 이름 덕분인지 유독 외국인 관광객들이 붐벼 내년 유리 이글루 지붕을 한 호텔을 하나 더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호스텔 체크인은 호텔에서 맡고 있다. 호스텔 싱글룸 가격은 호텔의 반값 정도인 2박에 95 유로. (국제유스호스텔 회원카드로 할인받은 가격이다) 방안에 화장실과 샤워실이 딸려있는 깔끔한 곳인데 역시 직원이 없기에 가능한 가격이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사단이 일어났다.

새벽 일찍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만들어 마시러 지하1층의 공동식당에 내려갔는데, 룸키를 방안에다 두고 나온 것이다. 잠결에 룸키 대신 호스텔 입구의 도어키를 들고 나온 것. 할 수 없이 600m 떨어진 호텔까지 새 키를 받으러 뛰어가야 했다. 요즘 이곳은 해가 지지 않아서 밖은 대낮처럼 밝았지만 인적은 없다. 막 감고 나와 산발인 머리를 하고 미친 듯이 새벽 거리를 뛰었다. 겉옷은 안 걸쳤지만 그나마 옷을 차려입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타월만 감고 있었다면 아주 볼만 했을 것이다. 어쩌다 지나가는 차뿐이니 볼 사람도 별로 없지만, 영상 10도 정도로 그다지 춥지 않아 더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도 로비에 있던 지도 한 장을 들고 나온 것 또한 다행이었다. 마구 달리다보니 호텔을 지나쳐 강가까지 와버렸다. 지도를 확인해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했다.

새벽 6시가 갓 넘은 시간, 호텔 로비는 수습직원인 듯한 젊은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키를 두고 나왔다고 얘기하니 이름을 확인하고 새 카드키를 내준다. 완전 뭐 씹은 듯 고까우면서도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무안하고 부끄럽게 느껴지게 만든다. 어찌됐든 다시 600m나 되는 거리를 되짚어 걸어 가까스로 내 방에 입성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운동 잘했다고 해야하나.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