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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13)] 하얀 순록 그리고 그 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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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13)] 하얀 순록 그리고 그 고기

6월18일, 핀란드 사미문화의 중심지 이나리


6월18일 소단퀼라에서 오후 1시45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오후 5시 이나리에 도착했다. 버스가 이나리호텔 앞에 서길래 숙소도 이나리호텔로 정했다. 근데 호텔에 지도도, 안내서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쪽에서는 지도나 안내서는 관광안내소에서나 갖춰놓으면 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 덴마크 오덴세에서도 기차역에 내렸는데 그곳에 지도가 없어 당황했다. '호스텔에 가니 있다더라'는 글을 본 기억이 있다. 그나마 숙소에 지도라도 갖춰놓은 곳은 ‘센스’가 있는 곳이랄까.

리셉션에 물어보니 관광안내소로 가보란다. 유럽에서는 웬만한 데는 대여섯시면 문을 닫는 것이 일반적이라 그래도 이곳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어야 안심될 것 같아서 방에 짐을 던져놓고 400~500m 되는 거리를 물어물어 가며 달렸다. 인구밀도가 극히 낮은 곳이라 물어볼 사람 만나기도 힘든데, 참 달릴 일도 많다. 운동에는 젬병이었는데 달리기 선수 뺨치게 매일 달리는 것 같다. ‘나는 달린다’라는 책제목이 떠오른다.

작년 11월 세계적인 여행안내서 론리플래닛 북유럽편이 한국어로도 출간됐다. 국내에서도 북유럽 관광이 시장성이 가질 때가 됐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국내 출판사에서 발간된 대부분의 여행안내서들은 일본어 책을 ‘우라까이’(베껴서 대충 재조합)한 것들이라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하다. 언제적인 것인지 모를 정보들도 많다. 론리플래닛은 발로 직접 뛰어 만든 책인 것을 알 수 있다. 어설프게 멋을 부리지도 않고 피상적이지 않고 배낭여행객들에게 실용적인 정보가 많다.

큰 길가에 드문드문 낮은 건물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미족 수공예품을 파는 ‘사미드이뤼’. 가까이가보니 오후 5시에 이미 문을 닫았고 곁에 있는 현급지급기 ‘오또’에 돈을 찾으러온 원주민 남자에게 물어보니 영어를 못하는지 대충 손짓으로 저쪽으로 가보라고 한다. 친절하게도 차를 타고 가다가 창문을 열고 또 손짓으로 건물을 가르쳐준다. 사미족들과 핀족들이 섞여 살아가는 동네인데 중년 이상의 사미족들은 대개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듯싶다.

그가 알려준 곳은 사미문화센터인 사요스(Sajos). 역시나 오후 5시까지가 오픈시간이고 도서관은 문을 열고 있어 물어보니 시다(Siida) 박물관까지 가라고 알려준다. 이곳이 관광안내소를 겸하고 있는데 다행히 여름철에는 오후 8시까지 문을 연다. 성수기라고 할 수 있는 6월1일~9월19일에는 오전 9~오후 8시 에 열고, 그외의 기간에는 오전 10~오후 5시에 열며 월요일은 쉰다.

숨이 차 헐떡대면서도 미녀들의 밝은 웃음을 보니 피로가 가시는 것 같다. 평화로운 작은 동네라 그런지 여유롭고 여인들의 환한 미소가 특히 아름다워 눈이 부신다. ‘웃는 여자는 다 예뻐’라는 유행가 가사도 있지만 하나같이 미인들이다. 흑발 미녀 마르카의 상냥한 안내를 받았는데, 왜 호텔에 지도를 갖춰놓지 않느냐, 그때문에 엄청 뛰어왔다고 하니 “작은 타운이라 지도가 필요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웃는다.

지도를 보여주는데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작은 동네였다. 내가 뛰어오면서 본 것들이 이나리의 전부였다. 소단퀼라에서 버스를 타며 거쳐온 사리셀카와 이발로가 오히려 더 큰 관광지였다. 그래도 핀란드 사미족 문화를 배우기에는 사미국회가 있고 뮤지움이 있는 이곳이 제격이다.

이나리에서 30여분 거리인 이발로에서는 버스역에서 30여분간 정차했는데 강물에서 어찌나 썩은 냄새가 나는지 기분이 나빴다. 처음에는 그게 버스역 화장실에서 풍기는 악취인줄 알았다. 사리셀카에는 꽤 많은 리조트가 있는 듯 했다. 사파리, 트레킹, 각종 레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도 많이 안내돼 있었다. 지나오다가 봤는데 뾰족 유리지붕으로 된 숙박시설도 있었다. 겨울 밤하늘의 오로라를 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들었다.

이나리 관광안내소는 인근지역 관광자료들까지 깔끔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았는데 사리셀카에 있는 산타스 리조트 팸플릿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꿈꾸던 산타마을이 이런 소박한 오두막 아닐까 싶게 아기자기하고 키치적 그림지도를 그려놓았는데 영어, 핀란드어, 중국어, 일본어 4개국어로 씌여져 있다. 동양인 관광객을 끌어들일 목적으로 지은 것 같다. 지난겨울 새로 오픈한 곳이라고 한다. 로바니에미 산타마을이 지나치게 상업화, 거대화되면서 이런 대안적 관광지가 생길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웬만한 자료를 얻을 수 있기에 짐이 될만한 자료들을 이동하면서 다 버리고 오는데 (90년대 초반 처음 해외나들이로 뉴욕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이라 새로운 정보가 담긴 것은 무조건 챙기니 짐이 이민가방으로 하나 가득이었다) 이 팸플릿만은 챙겼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비로운 흰색 순록 한마리 ‘파파라치’

저녁을 먹으러 이나린 쿨타호비 호텔로 슬슬 걸어가는데 새하얀 순록 한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순록농장들은 이나리 중심지에서 30㎞정도 이상 떨어진 곳에 있다는데 여기까지 혼자 마실 나왔나보다. 방목하는지라 길거리에서 순록이 걸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듣긴 했지만, 6월20일까지 이나리에 머물면서 딱 한 마리 만난 녀석이다. 아직 털갈이를 마치지 않았는지 듬성듬성 빠진 털이 있었으나 겨울 보호색인 눈처럼 흰털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흰색 동물은 상서로울 정도로 신비롭게 여겨졌다. 뿔까지 흰색털로 덮여있는 이 녀석은 풀과 나뭇잎을 뜯어먹으며 제멋대로 돌아다녔는데, 그 녀석의 뒤를 계속 뒤따라가며 사진을 찍었다. 사람에게 키워지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다만 내가 계속 카메라 스트로보를 터트리는 것이 좀 귀찮은 듯 했다.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뿔에 받힐 위험이 있다는 것도 간과하고 가까이 가서 구경을 했다. 그러고보니 왜 이리 길가에 개똥이 많나 했던 것이 순록의 배설물들이었다.

나중에 사진파일에 저장된 시간을 보니 불과 10여분간 따라다니며 ‘파파라치’를 했는데 그 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털달린 동물은 다 좋아하긴 하지만 처음보는 이 녀석은 참 신기하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나를 마중하러 나온 녀석인 듯, 행운의 상징인 듯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한번 가는 데까지 쫓아가볼까 하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포기했다. 또 만날 수 있겠지 했는데, 그 뒤로는 비가 오는 날씨 때문인지 보지 못했다. 북극권에 올라와서는 내내 날씨가 좋지 않았다. 라우나 동물원에 갔던 16일 하루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일기예보를 보니 북극권에는 내내 비가 내리는 듯한데 18일 오후에는 날씨가 좋아 포근했다.

급류가 흐르는 강옆, 전망 좋은 이나린 쿨타호비 호텔에는 전통식으로 요리한 순록고기를 파는 아나르(aanaar)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순록을 바로 만난 뒤라 미안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맛보지 않을 수 없다. 전통식 순록 소이티드(잘게 썰어 튀긴 요리법)를 시켰는데 매시트 포테이토에 올려진 고기는 링곤베리잼, 미니어처 오이피클이 함께 나왔다. 스테이크보다 훨씬 먹기 편했고 달콤한 잼과 함께 먹는 것도 내 입맛에는 맞았다. 숲이 많은 만큼 숲에서 자라는 갖가지 베리류를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문제는 내 작은 위장과 떨어지는 소화능력. 채 3분의 2도 먹지 못했다. 유전적 소인도 있는 데다가 기자질을 오래하며 얻은 위염과 위하수가 있는 위는 대체 많은 양의 음식을 한꺼번에 소화시키지 못한다. 게다가 비까지 오는 저기압인 날이면 소화불량이 심해진다. 그래서 위를 자극할 다른 음료나 디저트를 시키지 않고 메인디시만 주문했는데 웨이트리스는 그게 내내 못마땅한지 처음에는 활달했던 태도가 틱틱거리는 것으로 변했다. 계산서를 가져다달라는 데도 한참 딴청을 피웠다. 유럽인들은 허례허식이 없고 합리적인줄 알았는데 다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음식가격은 21.70 유로. 팁을 주지 않을까 하다가 오이피클을 더 가져다준걸 쳐서 2 유로를 더 얹어놓고 냉큼 나와버렸다. 제한된 예산으로 높은 물가를 감당해야하는데 왠지 식당가기가 겁이 난다. 다음날 아침까지 소화가 잘 되지 않아 호텔에서 주는 아침 뷔페도 얼마 먹지 못했다.

◇핀란드 작가 파실린나와의 동질감

여기에 오니 도로안내판에 반가운 지명이 보인다. 이곳이 키틸라(Kittilä)로 가는 길목인가 보다. 핀란드의 인기작가 아르토 파실린나(Arto Paasilinna)가 태어난 곳이다. 정확히는 1942년 독일군을 피해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거쳐 도망 중이던 부모가 키틸라 마을을 지나던 트럭 안에서 그를 낳았다. 그렇게 태어나서인지 그의 작품들에는 유난히 여행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그가 한국에서 유명해진 것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뮤지컬 ‘기발한 자살여행’의 원작자로서다. 그의 유머러스한 촌철살인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핀란드 작가로는 드물게 국내에 9권이나 번역됐다.

벌목꾼과 기자로 일했던 자전적 경험이 녹아들어간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핀란드의 웅장한 자연을 느끼게 해준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숲, 군데군데 나타나는 호수(핀란드어 국가명 ‘수오미’인데 호수, 혹은 늪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만큼 호수가 흔하다), 잔잔한 호수에 비친 물그림자,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림같은 풍경이 나온다.

1975년 발표된 ‘토끼와 함께 한 그해’는 국내에 뒤늦게 소개돼 2007년 청소년추천도서로까지 선정됐다. 주인공 카를로 바타넨은 마흔살 가량으로 헬싱키에서 기자생활 중, 사진기자와 함께 출장에서 돌아오다가 차에 친 토끼를 따라 숲으로 들어가 그 길로 핀란드 전국을 배회하게 된다. 그를 찾아 ‘으르렁거리는’ 부장과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울부짖는 부정한 아내에게 “제발 나를 그냥 두시오. 바타넨”이라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이보다 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까!

이 책을 스마트폰에 다운로드 받아왔는데 구절구절이 마음을 울린다. “청년 시절의 희망은 이루지 못했다. 아니, 엇비슷한 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직업은 그럴듯한 것이었다!…적어도 자신이 부당한 일에 대해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자신이 의미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언제부턴가 그는 시키는 일만 하면서 비판적인 지적은 포기했다. 동료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불만이 가득했고 냉소적인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상당히 괜찮은 봉급을 받고 있었지만 바타넨은 항상 돈에 쪼들렸다. 헬싱키는 주거비가 비싸기 때문에…내 집은 평생 가질 수 없을 듯 했다.”

그건 이번 여행을 떠나온 내 마음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핀란드에 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지명들을 하나하나 밟아오고 싶었다. 헬싱키에서 출발, 투르쿠, 로바니에미, 소단킬라 등을 거쳐 핀란드에서는 마지막 기착지인 이나리까지 왔다.

우려하던 바와 달리 잘 적응하고 있는 내 자신이 기특하게 생각된다. 바타넨처럼 여행체질이 됐다. 바타넨은 토끼 한마리를 안고 다니지만 나는 대신 기린모양의 목베개를 하나 끼고 다닌다. 한시간씩 걸리던 짐싸기도 속도가 붙어 군인 군장하듯 한다. 캐리어에 짐들을 쑤셔넣고 올라타 지퍼를 잽싸게 잠그고는 세워 방수용 커버를 뒤집어 씌우고 씩씩하게 끌고 여행을 다닌다.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