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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권력’ 시진핑의 정책 방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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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권력’ 시진핑의 정책 방향은?

[글로벌이코노믹=숀맹기자] 중국의 차기 권력자인 시진핑 부주석의 공산당 총서기 취임을 한 달여 앞두고 ‘시진핑시대’의 권력구도 변화와 정책 방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시진핑(59) 중국 국가 부주석은 11월8일 공산당 총 서기에 취임하고 내년 3월 열리는 전국 인민대표 회의에서 국가 주석으로 정식 선출된다.
시진핑과 리커창을 쌍두마차로 출범하는 ‘5세대 리더 그룹’은 신중국인 중국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에 태어난 ‘신세대’다.

이들은 유로존 경제위기로 촉발된 세계경제 침체 속에 미국과 함께 세계 양대국(G2)인 중국을 글로벌 수퍼파워(G1)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시진핑은 누구인가?=시진핑은 혁명원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산간벽지의 농민으로. 무명의 지방관료, 펑리위안의 남편에서 중국 최고지도자 즉 당서기로 등극할 예정이다.

시 부주석은 1953년 6월15일, 4남매 중 장남이며 셋째로 베이징(北京)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진핑(近平)은 베이핑(北平, 베이징의 옛 이름)에 가깝다(近)는 뜻으로 그의 선친인 시중쉰이 지어줬다.

시중쉰은 마오쩌둥(毛澤東), 주은래(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등과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참여한 원로. 저우언라이 총리의 심복으로 부총리까지 지낸 고위간부다.
이 덕분에 시진핑은 ‘빠이(八一)초등학교’와 ‘야오링야오(101)중학교’에 다녔다. 빠이초등학교는 중국 인민해방군 창립기념일(1927년 8월1일)을, 야오링야오중학교는 중국인민공화국(신중국) 건국기념일(1949년 10월1일)을 기념하고, 인민해방군 간부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학교다.

공산당 고위 간부 자녀들 즉 덩샤오핑 아들인 덩푸팡, 시진핑을 후진타오 후계자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 위쩡셩 상하이시 당서기, 한때 돌풍을 일으켰던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 등이 이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 시중쉰은 1962년 ‘마오 주석과 공산당을 반대하는 야심가이며 음모가’라는 비판을 받으며 투옥돼 1976년까지 14년 동안이나 감옥생활을 했다.

이 여파로 어머니인 치션도 강제노동에 보내졌고, 시진핑도 1969년 1월 샨시성 옌안시 옌촨현의 량자허로 좌천됐다. 량자허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아주 조그만 농촌으로 ‘아버지를 잘 만난 죄’로 산간벽지로 귀양을 간 셈이다.

시진핑은 이곳에서 칭화대학교에 입학하는 1975년10월까지 만 6년9개월을 보냈다.

‘오관(五關, 5가지 관문)’ 즉 벼룩, 거친 잡곡밥, 고된 노동, 옷 양말 이불을 스스로 만들어 써야 하는 일상생활을 참지 못해 한때 베이징으로 도망갔지만 백모의 설득으로 다시 돌아와 공산당에 입당해 이곳의 서기까지 지냈다.

량자허의 힘든 생활을 하면서 ‘지청(基層, 노동자 농민 등 사회 최저층으로 중국 공산당의 기반이 되는 계층)’의 고통을 이해하게 됐고 몸에 밴 낮은 자세로 결국 최고의 자리에 등극 하게 됐다.

시진핑은 1979년 4월 칭화대학교를 졸업한 뒤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실에서 3년 동안 겅뺘오 국방장관의 비서를 했다. 그는 1982년 3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지방 근무를 자원해 허베이성 쩡띵현 부서기로 부임했다.

1985년 6월에는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저장성 부서기 겸 부성장으로 옮기는 2002년 10월까지 18년 가까이를 푸젠성에서 살았다.

그는 샤먼시 부시장이던 1987년 9월(당시 34세) 미인 여군 가수 펑리위안(당시 25세)과 결혼했다. 당시 산둥성 한 현의 문화원장이던 그녀의 아버지는 ‘양가의 배경이 너무 차이 난다’는 이유로 둘의 결혼을 적극 반대했다.

하지만 둘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신고를 하고 동료들을 초대해 결혼식을 올렸다. 펑리위안은 대단한 인기를 누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었다. 둘 사이에는 시밍저라는 딸이 있다.

시진핑은 2003년1월에 저장성 서기가 됐고 상하이방과 공칭투안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상하이시 서기가 됐다.

쩡칭훙의 적극적 지원으로 2007년 10월에 상무위원 6위에 오름으로써 5세대 리더의 선두주자로 발돋움 했다.

마침내 1969년 1월부터 거의 40년 동안의 인내와 기다림 끝에 세계가 주목하는 거대 경제대국의 최고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시진핑의 정책=시진핑 체제는 경제에선 개혁, 개방을 지속하되 정치에서는 보수적 입장을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집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민생행보에 역접을 둘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말을 아끼는 스타일로 속내를 잘 들어 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은 부패와 당 기강 해이를 잡는 데 역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앞서 그는 보시라이(63) 전 충칭시 서기를 당기율과 국법에 따라 엄격히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체제 안정을 위해 올해 쏟아부은 돈은 전체 국방비 119조원 보다 많은 약 125조원에 이른다.

시진핑 시대의 키워드가 민(民)이 될 것이란 시각도 있다.

지난 40여년간 어려움을 겪은 시진핑은 정책적으로 서민용 주택인 보장방 건설을 확대하고 개인세금 감면과 5대 보험 강화 등을 지속적으로 시행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시진핑이 ‘사람들이 행동이 없는 공허한 구호에 피곤해 하고 있으며 비현실적 약속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시진핑의 과제=시진핑 체제는 장기적으로 수출 투자 중심에서 민간주도의 내수 중시로 성장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또한 단기적으로 8% 아래로 떨어진 중국의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려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고 출범한다. 시진핑은 상무위원 집단체제를 이끌면서 집권초반 정권안정의 기반을 다질 것으로 전망된다.

후진타오(70) 주석이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물려주지 않고 2년가량 더 보유할 것이란 전망도 확산되고 있다.

시진핑의 국정 운영은 장쩌민(86) 당주석 등 당 원로들의 영향력도 여전히 막강해서 이들 원로들과 어떻게 잘 융화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민들과 내부의 권력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 필리핀, 베트남과의 영토 분쟁에서 강경 민족주의 노선을 취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중국은 현재 주변국들과 영토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중국호의 선장으로 등극한 시진핑이 글로벌 경기 침체와 정치, 군사, 외교에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