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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나 돌에 글을 새기며 옛 선비의 정취를 떠올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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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나 돌에 글을 새기며 옛 선비의 정취를 떠올리죠"

書刻의 뿌리는 갑골문과 암각화…현판이나 주련 등으로 이어져


전통 서예 익힌 뒤 서각 입문 바람직


“마지막이라 했지만 서각의 손맛 잊을 수 없어 다시 도전하고파”




■ 인터뷰-상산 신재석 선생


나무나 돌에 글을 쓰고 새김질 하는 서각(書刻). 문자의 발생과 함께 탄생한 갑골문과 암각화가 서각의 뿌리임을 생각할 때 인류의 예술본능과 함께해온 미술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인 8세기 중엽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세계 최고의 목판각 예술의 결정판인 국보 제32호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서각 예술의 최고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와 돌에 글을 새기는 전통을 잇고 있는 상산(常山) 신재석(申載錫) 선생은 여든 세 살이라는 나이 탓에 ‘마지막’이라는 말을 되뇌면서도 쉽게 망치와 칼과 끌을 내려놓지 못한다.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새겨나가는 손맛을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재석 선생을 만나 우리 민족 고유의 서각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집자 주>



-서각(書刻)이란 무엇입니까?


“서각의 전통은 아주 오래되었어요. 문자의 발생과 함께 인간이 남기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중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팔만대장경이 서각 예술의 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라를 구한다는 염원을 품고 혼신의 힘을 다해 정성껏 글자를 새기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으면 제 자신이 흥분됩니다. 그 이후에도 우리 서각예술은 발전을 거듭해 서원, 정자, 그리고 사찰의 현판이나 주련(柱聯‧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에 그 전통을 남겨왔지요. 특히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유랑하면서 시 한 수를 짓고, 서각가(書刻家)가 이를 새겼는데,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지요. 무릉계곡의 정자나 유명 서원에는 지금도 서각을 통한 문자의 조형미가 우리의 숨을 멎게 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어요.”
전통서각은 현대에 오면서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가 한문 교육을 외면한 탓에 한시를 읽거나 사언절구 등을 이해하지 못해 글을 새기는 전통이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 20여 년 전 인사동에 서각을 하는 예술가가 출현, 화제를 낳았다고 한다. 그 예술가가 각자장으로 있는 인간문화재 오옥진 선생이다. 이를 계기로 사라질 뻔했던 서각 예술이 부활하기 시작했다고 상산 선생은 회고했다.

“그렇다고 제가 오옥진 선생에게 배운 것은 아닙니다. 저는 부친에게서 한문과 서예를 배웠고, 체신부 공무원을 그만두고 소일거리로 서각을 시작했다가 그 매력에 푹 빠져 들었지요. 서각 예술이 일반에게 알려지면서 갑자기 전통서각협회와 현대서각협회가 생겨났어요. 전통서각협회는 서예의 전서, 해서, 행서를 기본으로 한 서각을 선보였다면, 현대서각협회는 해서, 행서를 기본으로 현대적인 글자를 새겼지요. 당연히 전통서각협회는 옛글인 한문이 중심이 되었고, 현대서각협회는 한글이 중심이 되었어요. 그래서 몇몇 뜻있는 분들과 두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송헌(松軒) 안민관(安民寬) 선생이 앞장을 섰어요. 그렇게 해서 탄생한 협회가 (사)한국서각협회입니다.”

-(사)한국서각협회는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대한민국서예대전과 대한민국미술대전과 같이 대한민국서각대전을 주최하고, 한국,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서각 전통이 남아 있는 5개국의 서각예술가들과 함께 국제각자예술전과 국제각자공모대전을 개최하고 있어요. 특히 공모전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서각예술가들이 각각 500점을 출품했고, 중국은 무려 8000점을 출품하는 바람에 사진으로 먼저 4000점을 가려내고 심사를 하기도 했어요.”

-한중일 서각예술을 비교해주시죠?


“중국과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서각예술의 전통이 거의 단절됐다고 보아야 해요. 한중일 가운데는 우리 한국이 제일 앞서가고 있고, 국제각자예술전과 공모전을 통해 중국과 일본이 비슷한 수준으로 따라오고 있는 형국입니다. 후발주자인 중국은 최근 서각기념박물관을 만들었는데, 제 작품도 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서각 세계에 어떻게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요?


“철부지 시절이던 열 살 때 집 마당에 서 있던 대추나무 가지를 잘라 도장을 새긴 일이 있어요. 돌이켜보면 이게 시작인 것 같아요. 원래부터 서각에 소질이 있었던지 군에 입대하였어도 저희 포병 부대의 간판들은 제가 도맡아했지요. 그런데 1952년 휴전을 하기 직전 강원도 인제에서 4m 크기의 큰 바위에 ‘명중탑’이라고 새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다음날 바로 폭격을 맞았어요. 포병부대로서 적을 명중시키자는 결의에서 ‘명중탑’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적의 표적이 될 줄은 몰랐던 것이지요.”

상산 선생은 어릴 때부터 먹물을 가까이 해왔다고 한다. 부친이 붓글씨를 쓸 때면 곁에서 늘 먹을 갈았고, 남몰래 종이에 글을 썼다. 물론 정식으로 서예를 배운 적은 없지만 어깨 너머로 배운 서예실력이 남달라 전서, 행서, 해서는 수준급이고, 예서도 남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단다.

“서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98년쯤으로 기억해요. 당시 놓고 있던 붓도 다시 잡고, 서예를 하다 보니 슬슬 나무에 붓글씨를 붙여놓고 칼질을 해보고 싶어졌어요. 정성껏 새긴 글씨가 살아서 굼틀굼틀하는 것 같아 나름대로 자부심도 생겼고요. 이후 독학으로 나무와 돌에 글씨를 새겨왔고, 다섯 번에 걸쳐 대형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서각과 전각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서각이 나무나 돌에 글씨를 새기는 것이라면, 전각은 왕의 도장이라 불리는 옥새문화에서 나왔어요. 요즘 서예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돌에 이름을 새기는 전각을 하지만, 사실 제대로 된 전각은 옥새전각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옥새전각장은 단단한 동(銅)이나 옥(玉)에 조각도로 바로 글을 새깁니다. 우리 전통의 기(氣)의 운용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이게 일반 서각과 전각의 차이입니다.”

-서예와 서각은 어떤 점이 다른가요?


“서예와 서각은 우선 맛이 달라요. 서예는 평면예술이고, 서각은 입체예술이어서 보는 맛이 다르지요. 특히 양각과 음각으로 새겨진 서각은 깊이가 있어 굉장히 희열을 느끼게 해줍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해 놓으면 하늘을 날 것 같은 흐뭇한 느낌이 들지요.”

-한중일의 서각 방법에 차이가 있습니까?


“옛날에는 한국이 45도각을 활용한 전통서각법을 사용한 반면에 일본은 90도각을 활용한 음평각을 사용했다고 해요. 그러나 교류전을 자주 하다 보니 지금은 기법이 거의 같아졌어요. 일본 도쿄를 가면 서각을 한 간판이 아주 많고, 중국 베이징을 가면 현판이나 주련이 많이 남아 있어요. 그런데 중국은 현대에 와서 간판을 위주로 하다 보니까 글씨는 잘 쓰는데 서각으로서 새기는 손맛이 나지 않아요. 중국과 일본이 교류전을 통해 한국 서각예술의 우수성을 알아보고 따라하다 보니 지금은 우리가 약간 앞서고 두 나라가 뒤를 바짝 좇는 형국입니다.”

신재석 선생은 한국의 서각이 중후한 느낌을 준다면, 일본이나 중국은 무게감이 덜한 편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한국의 서각은 칼과 끌로 작업한 손맛이 잘 살아 있는데 반해 일본이나 중국의 서각은 시쳇말로 간판집의 간판과 흡사하다는 얘기다.

-5서체를 중심으로 한 전통 서예를 아는 사람과 서예를 모른 채 서각만 하는 사람은 격이 다를 텐데요.


“한국서각협회 이사로 재직하면서 제대로 된 서각을 하려면 서예를 알아야 한다고 많이 강조했어요. 서예를 모르면 남이 쓴 글을 받아 복사해서 새겨야 하는데, 분명히 자기가 쓴 글을 새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서예를 아는 사람이 서각을 해야 제대로 된 서각이 나옵니다.”


-서각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서각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제 나이가 들어서 나무나 돌을 들 수 없는 게 힘든 일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서각 자체가 어렵다고 하지만 전 어려운 걸 몰랐어요. 서각을 하면 할수록 재미가 나고 정자의 기둥에 글을 새기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져요.”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요?



“작품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구상이에요. 전체 구도를 어떻게 잡을지, 사물의 방향과 위치를 어떻게 둘지 고민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작품에 몰두하다보면 붕 떠 있는 느낌을 받아요. 특히 제 정신이 바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많아요. 돌로 서각을 할 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제일 아끼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모두 다 제 자식 같은 작품인데 딱 하나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굳이 한 점을 꼽으라면 ‘추석(秋夕) 천불동(千佛洞) 양폭계(兩瀑溪)’를 꼽고 싶어요. 친구와 함께 막내딸을 데리고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다가 만경대 하산길에 떠오른 시상을 한시로 짓고 이를 새긴 후 금분을 입혔지요. ‘낙조도 노을도 저 산 넘어 숨더니만 준령 숲에 떠오르는 교교한 달빛. 흐르는 냇물 속의 달을 떠서 밥을 끓이며 부서지는 달 조각을 잔에 띄워 노닌다. 아비는 딸과 담소하며 피로를 즐겨 풀고 말씨 좋은 친구는 밤새는 줄 모른다. 이 하얀 달 아꼈다가 남은 별과 함께하여 새벽바람 맞으며 가는 발길 비추리.’라는 내용입니다.”


-한시의 운율을 맞추는 게 어려운데 어디서 배웠나요?



“1972년도쯤 인사동 건국빌딩에서 한학자 홍찬유 선생으로부터 한시 강의를 들었어요. 대부분이 국문학과 교수인 다른 수강생과는 달리 저 혼자 강의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 몇 달을 주저앉아 열심히 익혔지요. 그게 기초가 돼서 한시를 짓기 시작했고, 지은 한시 600수 가운데 220수를 뽑아 상산한시 1‧2집인 ‘산경만리’(山徑萬里)와 ‘여로’(旅路)를 펴냈어요.”



-어떤 서각이 좋은 작품인가요?



“좋은 서각은 일반 대중이 관심을 갖고 유심히 쳐다보는 작품이지요. 요즘 간혹 한문을 이해하지 못해 그저 모양만 흉내를 낸 서각이 있는데, 그런 서각보다는 글을 완전히 이해하고 종합 구상을 하여 글을 새길 때 좋은 작품이 나와요. 글에 얽매이지 않고 글에서 자유자재로 노닐어야 아름다운 서각이 나오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시서화(詩書畵)가 하나였고, 서각과도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학문을 배우는 대신에 시는 시대로, 산문은 산문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서각은 서각대로 전혀 별개의 장르가 되었다. 물론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이 유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예술은 각 장르를 아우르는 통예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여든 세 살인데 뭘 거창하게 한다고 할 수는 없고 그저 힘닿는 한 짬짬이 노인정에서 서예를 가르치고, 그래도 시간이 나면 소품 위주로 서각을 해야지요. 예전처럼 기운이 왕성하지 못해 작업 속도는 느리지만 할 건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칠십부터 쭉 그런 생각을 해왔는데, 팔십이 넘어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냥 놀지 않고 몸을 움직일 생각입니다.”

/노정용 기자/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