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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산책-채근담]그대들의 천국, 누구를 위한 복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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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산책-채근담]그대들의 천국, 누구를 위한 복지인가

天賢一人 以誨衆人之愚 而世反逞所長 以形人之短 / 天富一人 以濟衆人之困 而世反挾所有 以凌人之貧 - <菜根譚> 前集 218 / 洪自誠

하늘이 한 사람의 현명한 이를 내는 것은 뭇사람의 어리석음을 잘 이끌라 함이거늘 세상은 도리어 제 잘난 것을 뽐내느라 사람들의 모자란 것만 들추고, 하늘이 한 사람에게 부를 몰아주는 것은 곤궁한 뭇사람들을 잘 구제하라 함이거늘 세상은 오히려 제 있는 바로 사람들의 헐벗음을 경멸하느니.
<해설>

아이와 가난한 사람들의 공통점이라면 꾀병을 부릴 줄 모른다는 것과 변명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 엄마들 중에 다 저녁때 들어온 아이의 접어올린 바지 단 같은 데 모래가 한 가득이고, 눕자마자 곯아떨어지는 걸 흐뭇해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옛적 골목대장처럼 종일 뛰어다닌 흔적 말이다. 아니면 부모는 그랬을지언정 너희들만은 흙발커녕 온실 화초처럼 폼나는 악기 레슨이며, 다 같은 운동이라도 기구 잘 갖춘 체육관에 시간 맞춰 보낼지도. 꾀병이란 게 뭔가. 아픈 척 하고 그로 인한 어떤 보상을 바라는 심리일 것이다. 정작 어른은 그럴 수 있을지언정 아이가 아파하면 정말로 아플 때뿐이다. 그래서 어지간히 아파도 궁금한 거, 뭔가 새로운 거엔 눈이 반짝거리기 마련이다. 또래놀이에 빠지기 싫어서라도 더 그렇다. 그럼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가난한 사람이 꾀병부리고 엄살할 여가가 있는가. 죽을 만큼 힘들어도 지친 몸을 이끌고 다음날 아침이면 칼날같이 일어설 것은 그러지 않으면 당장 다음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 와중 자기변호조차 그럴만한 채널과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쓰는 사람 입맛대로 대변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입맛대로란 쓰는 논조는 이미 정해놓고 그 논거로써만 그들의 입장을 조각보처럼 편집한다는 뜻이다.

올해 들어 유난히 많이 들리는 단어가 ‘행복xx’니 ‘드림xxx’ 같은 것들이다. 행복, 드림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다음 끼니엔 어떤 맛집을 갈까가 아니라, 그저 먹는 것이기만 하면 되는, 수입이라곤 오로지 ‘엥겔지수’뿐인 가정에선 원도 없이 실컷, 먹고 싶을 때 먹는 것이 곧 행복이요 드림이 아닐까. 그런 정도 살이라면 그저 빚 탕감만으로는 여전히 해결 안 되는 현실이 굴뚝 높이보다 더 쌓여있기 마련이다. 당연 어느 정도의 수입을 ‘일정하게 보장’하는 일자리 또한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행여 전기라도 끊길까 세금만큼은 지출 일순위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도덕적 해이 운운은 도대체 어떤 상식인가. 게다가 이벤트성 ‘문화생활’이 도대체 어떤 구미란 말인가. ‘도덕’이란 글자 그대로. 도(道) 즉 사람들이 제 갈 길을 갈 수 있는 사회의 덕치(德治)가 아니던가. 상시(常時)가 아닌, 굳이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 ‘행사’라야 ‘현금’을 ‘만질 수 있다’고들 한다. 행복이 오가고 드림이 걸렸으니 복지할 수 있는 경제가 없진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돈 한 푼 구경도 못하고 이벤트에 끌려 다니며 하루가 다른 천정부지의 물가고에 허리가 휜다. 그뿐이랴. 같은 값으로 어제 먹던 것도 내일 먹을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런데도 쉽게 말들 한다. ‘가난하게 태어난 건 자기 잘못이 아니로되, 가난하게 죽는 건 그들 잘못이라고’ 똑똑하면서 부자인 그대들의 천국에선 말이다. 스스로 굽실거려야 하는 모멸을 받아 본 자만이 약자를 더 경멸을 하는 법이다. 도덕을 실천하는 사람다운 사람은 도와 덕을 그토록 쉽게 발설하지 못한다. 그 말의 실천, 겸양이 우선일 테니.

/장은조 번역‧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