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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거운 짐 내려놓고(169)]제9장, 道가 없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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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거운 짐 내려놓고(169)]제9장, 道가 없는 역사

“어머 반야경이 그렇게 방대해요?”

“그렇소! 하여간 현장이 생존했던 시기가 서기 660년이고, 신라가 서라벌이란 국호를 사용한 시기가 22대 지증왕 때까지인데 서기 500년이었소. 무려 160년이나 차이가 나지요. 그런데 어떻게 당나라 현장이 의역한 사위성을 따와서 서라벌 혹은 신라라 국호(國號)를 지을 수가 있었겠소? 역사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소리요. 하긴 내가 인도에 있을 때 어느 승려도 그러더군! 우리나라의 가야국도 인도의 붓다가야에서 따온 말이라고!”
“어머, 그러고 보니 가야라는 말이 같네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종교의 사대주의자들이나 하는 말이오!”

“.............!”

“가야는 석가모니 탄생 이전부터 존재했던 왕국이었소.”

“가야 중에서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도 인도에서 온 인도인 공주였다지요?”

“그것도 잘못된 말이오. 허 황후는 인도인이 아니오. 가야인이지!”
“하지만 역사의 기록이 있고, 절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걸요?”

“그래서 종교의 사대라 말한 것이오. 생각해봐요. 만약 허 황후가 인도 공주였다면 어째서 인도인의 이름이 없고 처음부터 허황옥이라 했겠소? 또 허 황후가 수로왕을 만나러 올 때 신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금관가야국 신하가 되었다 했소.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의식도 다른 이민족이 오자말자 곧 바로 가야국의 신하가 돼 정사에 참여할 수 있단 말이오?”

“정말 그러네요? 이름도 그렇지만 바로 말이 통했다는 것도 이상해요?”

“그 당시 가야인들이 인도의 일부지역까지 진출해서 또 다른 가야국을 세웠었소, 인도 땅의 가야국 공주가 본토의 가야국 왕과 혼인한 것이지요. 사실 인도에는 우리의 역사를 많아 볼 수 있소. 따라서 붓다가야가 오히려 우리의 가야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아요!”

한성민은 좀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답답한 가슴을 못 참은 듯 벌떡 몸을 일으켜 역사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음 여행지로 가자하였다.

최서영은 말없이 남편의 뒤를 따르면서 생각했다.

오직 도(道)만을 생각하며 도 자체가 되고자 하는 사람, 그런 사람 가슴 속에 뜨거운 역사관과 민족의식까지 품은 그 사람의 아내 된 자신이 한없이 작으면서도 자랑스러웠다.

산속 마을은 아니어도 너른 벌판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초가집들, 그리고 지붕으로 타고 오른 넝쿨에 주렁주렁 매달린 호박이 소담스러웠다.

그리고 우물우물 되새김질하는 소가 어슬렁이는 울타리 없는 마당이 옛 시골마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거기다가 마을 앞에 몇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 푸른 가지로 그늘지어 선 모습은 서낭당이요, 그 아래 모여앉아 글공부하는 아이들은 우리의 오늘을 60년대로 되돌려놓은 듯했다.

갠지스에서 콜카타까지 차에서 잠자며 보고 또 보아도 시골은 그런 모습뿐이었다. 멀고도 먼 길이지만 이국의 동네가 낯설지가 않은 정취감이 있어서 그리 지루한 줄도 몰랐다 하지만 콜카타는 달랐다.

이국의 풍물이 한 눈에 낯설었다. 한 거대한 박물관에 들어와 온갖 기구들을 보는 듯도 하고, 인간시장에 온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