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나라가 없으면 제사가 무슨 소용" 神主 묻어버린 儒林

공유
0

"나라가 없으면 제사가 무슨 소용" 神主 묻어버린 儒林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3)]'殺身保國' 석주 이상룡의 종가 안동 '臨淸閣'

수백억대 전 재산 처분 후 만주서 항일 독립운동 임정 국무령 역임


"나라를 찾기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이장말라…" 유언 남겨


아들은 일제 변절강요에 '수치' 자결…가문 풍비박산 후손들 고생


▲현재임청각을지키고있는종송이항증선생(광복회경상북도지부장)
▲현재임청각을지키고있는종송이항증선생(광복회경상북도지부장)
[글로벌이코노믹=김영조 문화전문기자]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이장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긴 안동 유림의 거목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대통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1858~1932) 선생이 태어난 경북 안동의 임청각(보물 제182호)을 찾아 간 날은 5월 중순인데도 3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런데 임청각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입구)가 왜 이리 복잡할까? 낙동강을 따라 난 육사로에서 법흥교와 맞닿은 법흥6거리를 지나자 왼쪽으로 ‘임청각’이란 안내판이 보이지만 철도길이 놓여 있어 쉽게 접근할 길을 찾지 못해 전화 통화 뒤에서야 겨우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임청각, 일제의 흉계에 의해 훼손되다

그 까닭을 확인하니 일제강점기 일제의 흉계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항일투사의 집을 아예 없애려 했다. 그러나 여론이 좋지 않자 집 몇 채를 허물고 마당으로 철길을 내버린 것이다. 철길이란 보통 직선이 원칙으로 안동에서 영주로 가는 철도라면 35번 국도를 따라 내는 것이 공사비도 적게 들고 공사도 쉬웠을 텐데 구태여 임청각을 훼손하면서 까지 이곳에 철길을 낸 것은 음험한 짓이었다.

▲군자정내부에는석주이상룡선생사진을비롯한정부로부터받은훈장등이걸려있다.
▲군자정내부에는석주이상룡선생사진을비롯한정부로부터받은훈장등이걸려있다.
민족지도자의 집인 임청각이 눈엣가시였던 일제는 십여 킬로미터를 더 돌아 세 개의 굴(터널)을 뚫고 옹벽과 축대를 쌓는 등 두 번이나 급하게 휘면서 임청각 마당 앞에다 철도를 놓았던 것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바로 그 철길 때문에 맥이 끊긴 듯 가슴이 답답하다. 이제 철도를 서쪽으로 옮기고 임청각을 제대로 복원한다니 천만다행이나 참으로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임청각은 귀래정 영호루와 함께 안동의 명승이다”라고 했을 만큼 정경이 빼어난 임청각이다. 이 집은 영남산 기슭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 기단을 쌓고 건물을 배치하여 어느 방에서도 하루 종일 햇빛이 들도록 채광효과를 높였으며,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집 구조를 하고 있다.

선생의 증손자인 종손 이항증 선생(75)은 기쁜 얼굴로 기자를 맞는다. 여러 번 서울에서 뵙고 말씀도 나눈 사이지만 이렇게 임청각까지 와서 집안 이야기를 듣자니 가슴이 먹먹해 왔다.

▲석주이상룡선생
▲석주이상룡선생
정갈한 대청마루에 기자와 마주 앉자 종손은 이집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전설의 실타래를 풀듯 풀어내신다. 흔히 종가에는 종부가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고 있지만 임청각에서는 종손이 기자를 맞이한다. 식구들은 이 집에 거하지 않고 종손 혼자 내려와 살고 있지만 집 안팎이 매우 정갈하고 깔끔했다.

“이 집은 난방도 잘 안되고 해서 겨우살이가 아주 힘듭니다. 지난겨울에 참 고생했어요. 하지만, 올봄 광복회 경상북도지부장에 뽑혀 이곳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종손의 말처럼 현재는 생활하기가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이다. 다른 종가처럼 누대로 종택에 살아 온 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할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이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떠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다보니 종가집의 운명도 그와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대담 중에 간간이 기차가 마당 앞으로 난 철길로 덜커덕 소리를 내며 지나갈 때마다 일제의 망령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고 활개를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자정뒤로있는사당.그뒤편산에신주를묻었을것으로추정된다.
▲군자정뒤로있는사당.그뒤편산에신주를묻었을것으로추정된다.
근황을 묻고 나자 종손은 집안 내력을 이어갔다. “석주 선생의 윗 선대인 이증(李增·1419~1480) 선생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 하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하여 이곳에 터를 잡게 되었지요. 임진왜란 때는 임청각 주인의 5형제가 의병에 참가한 바 있습니다. 석주 선생은 퇴계학 공부를 완성한 분입니다. 선생은 17살 때 당시 빼어난 유학자이셨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선생 문하로 들어가서 공부 했는데 만주로 떠날 54살 때는 이미 가장 큰 유학자로 존경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전국에서 60여 명의 유학자들이 나라를 잃은 의분에 자결했고 안동에서만 10여명이 자결했지만, 석주 선생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쾌재를 부르는 것은 일본이다. 따라서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라고 생각하셨지요. 그래서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석주 선생은 50년간 공맹(孔孟)을 했지만 헛공부를 했다고 생각했으며,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지식은 쓸모없다고 말했다고 종손은 말한다. 선생은 큰 유학자였지만 기독교사상은 물론 유학에서 이단 취급했던 양명학까지 아울렀던 가슴이 큰 학자였음을 얘기해준다.

만주로 떠나기 전 신주를 묻다

▲임청각을짓기전부터있었던가뭄이들어도물이마르지않는다는우물에대해종손이항증선생이설명하고있다.
▲임청각을짓기전부터있었던가뭄이들어도물이마르지않는다는우물에대해종손이항증선생이설명하고있다.
“석주 선생은 만주로 떠나기 전 사당 뒷산에 신주를 모두 묻었습니다. 선생은 나라가 없으면 신주도 의미 없는 것이라 말씀하셨고, 죽기 직전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고 유언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종가지만 신주가 없습니다. 아마도 당시 신주를 묻은 일로 안동 유림사회에서 큰 문제가 됐을 겁니다.”

석주 선생. 정말로 큰 인물이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휘어잡는다. 유학의 큰 인물이 유학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일을 어디 쉽게 할 수 있었을까?

“만주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선생의 손자가 청년 대표로 뽑혔지만, 나는 양대독자인데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건강도 안 좋으셔서 내가 보살펴드려야 하기에 대표는 어렵다고 사양했습니다. 이를 안 선생은 손자를 불러 나라를 되찾아야 할 때 집 걱정이 가당키나 하느냐. 나라 찾기에 전념하라고 호통을 치셨지요.”

요즘 자식 군대 안 보내는 공직자가 많은데 이들은 석주 선생이 살아계셨다면 크게 호통을 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재산을 다 팔고 떠났는데 오늘날 돈으로 계산하니 처분한 재산이 400억 원은 넘는다고 하는 말이 나돕니다. 하지만, 정확한 금액은 아무도 모르지요. 다만, 당시 집만 남기고 30리 정도 되는 임동장터를 모두 팔았으니 큰 재산을 처분한 것은 확실합니다. 또 1905년 1만5000금을 거두어 가야산에 항일 기지를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법흥교다리위에서임청각을바라본풍경.일제가놓은철도에임청각이가려져있다.
▲법흥교다리위에서임청각을바라본풍경.일제가놓은철도에임청각이가려져있다.
요즘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늘리려고 온갖 불법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 당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석주 선생의 실천적인 삶은 정말 보통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이야 말로 진정으로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제대로 실천한 사람이 아닐까? 이 시대에 과연 그런 사람이 다시 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만주로 떠난 석주 선생은 광복 후에 호적도 없었다. 그러다 법원의 판결로 석주 선생의 호적이 다시 부활되었지만 정부는 단순히 법만 개정하고 나머지는 개인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팽개쳐 이후 변호사 비용 등 무려 500만 원 가까운 비용을 들여서야 호적을 정리 할 수 있었다. 정부는 나라를 빼앗긴 적국치하에서 부당하고 억울한 호적이나 재산상의 문제를 찾아 정리해줘야 하는 기구를 두었어야 했는데 이러한 것을 모두 개인에게 맡겼으니 힘없는 후손들이 살아낸 지난한 과거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일이리라.

대담 내내 종손 이항증 선생은 겸손한 인품으로 독립운동가를 둔 후손들이 겪었을 어려움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재산을 처분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증조할아버지 석주 선생이 1932년 만주에서 세상을 뜨고, 그의 아들 이준형은 1942년 일제의 변절 강요에 저항하여 ‘일제 치하에서 더 사는 것은 수치만 더 보탤 뿐이다.’라는 말과 함께 자결했다. 그의 아들 이병화(현재 종손의 아버지) 선생은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 병사해 이항증 선생의 어린 시절은 이루 말 할 수없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공부도 남들처럼 번듯하게 할 수 없었음은 물론 남의집살이는 밥 먹듯이 해야 했으며, 심지어 아버지 없는 조카 결혼식에 여덟 번이나 혼주 자리에 앉아야 하는 일도 있었다고 회상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자신만이 아닌 독립운동가 후손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말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도 그 후손들이 풍찬노숙을 해야 하고 고통을 받는다면 앞으로 그 누가 나라를 위해 초개 같이 목숨을 버릴 것인가? 세 번째 종가이야기를 쓰면서 어떤 종가보다도 더 큰 나눔을 실천했으면서도 큰 고통을 받았던 임청각은 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다. 다른 종택에서 볼 수 있는 수십, 수백 개를 헤아리는 장독 하나 없음이랴! 모든 국민이, 배달겨레가 우리의 임청각을 찾아야만 그 구멍을 메워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