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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엔 '쓴소리 신하' 허조(許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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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엔 '쓴소리 신하' 허조(許稠)가 없다

[김기섭의 실록으로 배우는 소통] 잘못된 일은 그르다고 말할 줄 아는 허조

[글로벌이코노믹=김기섭 기자] 황희와 함께 영광스러운 세종시대를 일군 허조(許稠)는 요즘으로 치면 ‘쓴소리’ 잘하는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말 공양왕 때 과거에 급제한 이래 조선의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그이지만, 일관되고 한결같은 모습은 깐깐하고 비판적인 원칙주의자의 면모입니다. 그는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거침없이 직언하는 올곧은 신하의 표본입니다.

그의 강직하고 정직한 성품은 가족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허조의 처제가 일찍이 자식도 없이 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허조의 맏아들인 허후를 후계를 삼으면서 노비와 땅, 그리고 집과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제안을 해옵니다. 허조는 “내 자식이 비록 재주가 없지만 집을 계승할 만하다.”고 말한 뒤 “만약 재산을 많이 얻으면 반드시 호사스럽고 사치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라며 제의를 거절합니다. 부자로 살기를 바라는 여느 부모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올곧은 신하의 표본, “나의 충신은 오직 허조 뿐이다”

▲ 허조의 영정 허조의 이같은 곧은 성품은 태종 때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었던 모양입입니다. 전에 서연에서 허조를 스승[文學]으로 모셨던 세자는 태종 8년 또다시 그를 스승[右輔德)]으로 맞이하게 되자 “허 문학(許文學)이 또 왔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이 그 예입니다. 사사건건 쓴소리를 늘어놓을 허조에 대해 ‘죽었구나’, 하고 절로 한숨을 내쉰 것입니다.

직언은 세자에게 국한되지 않고, 왕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태종 12년 1월 태종이 대궐 안에서 제사를 위해 연등을 달라고 명하자 당시 이조참의였던 허조가 반대하고 나섭니다. 옛 문헌에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한(漢)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처음 시작한 제도를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평소 불씨(佛氏)의 도(道)를 인정해온 태종은 삼대(三代, 중국 고대의 하․은․주나라) 이후 한나라나 당나라 같은 것이 없다는 논리를 펴며, 한나라 제도를 본받지 말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허조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며,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에서는 삼대만을 따라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합니다.

태종 7년에는 토목공사의 중지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계획을 백지화시키기도 합니다. 허조는 공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폐해를 돌보지 않고 오직 빨리 하기만 힘쓰는데, 영선(營繕)하는 일이 더욱 심합니다. 사령이 된 자가 감독하는 관원을 두려워하여 엄하게 독촉하는 바람에 백성들을 채찍질하고 내몰고 소와 양처럼 다루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앞을 다투어 일하다가 나무와 돌에 다치는 백성이 자주 있습니다.” 이어 허조는 자신이 확인한 사상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럼에도 문책을 당한 자가 없다며 강력히 시정을 요구하는 한편, 죽은 사람들에게 보상하고 일을 면제해주고, 슬퍼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위로주어야 한다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사상자가 발생하면 보고하여 책임자의 죄를 묻고 숨기는 자에게도 벌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태종은 얼굴색이 변합니다. 왕은 지신사인 황희에게 “어찌하여 이런 일을 듣지 못했으며, 왜 나에게 고하지 않았는가?”라고 꾸짖고, “나의 충신은 오직 허조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역사를 중단시킵니다.

사실, 직언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송곳처럼 매섭고, 들으면 대개 아프고 쓰리기 마련입니다. 왕의 입장에선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허조는 일이 긴요하면 할수록 심지어 울면서 진언합니다. 태종은 그런 허조의 마음을 익히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의 비판이 사적인 마음이 아니라 공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았던 것이지요. 즉 그의 진정성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래서 허조를 충신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태종은 한 연회에서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에게 “이 사람이 진실로 재상(宰相)이다.”고 치하하고, 연회가 끝난 뒤에도 다시 허조의 어깨를 짚으며 “나의 기둥돌[柱石]”이라고 평합니다. 태종이 얼마나 허조를 신뢰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허조는 세종대에 들어서도 간언을 멈추지 않습니다. 세종이 펼치는 정책마다 비판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런데 허조가 요즘 정치인과는 다른 점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고 정책의 허실과 부작용을 염려하여 진언한다는 것입니다. 세종은 매번 허조의 매서운 비판을 끝까지 경청합니다. ”허조의 말이 옳다“, ”가상하다“, ”합당하다“, ”아름답게 여긴다“ 라는 등의 표현이 세종실록에 자주 나옵니다.

허조같은 신하, 박근혜 정부엔 얼마나 될까

나이 칠십에 이르자 허조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합니다. 세종은 윤허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비답을 내립니다. “좋은 계책을 아뢰고 큰일을 결정하는데 있어 내가 기대하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경은 몸을 보전하고자 하고 나는 임무를 맡기고자 하니, 몸과 나라 중 어느 것이 중하고 가볍겠는가.” 허조에 대한 세종의 신임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로부터 3년 뒤 허조가 마침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습니다. 졸기 말미에는 그에 대한 사평이 기록되어 있는데 새겨둘 만합니다. “낮이나 밤이나 직무에 충실하고, 만일 말할 것이 있으면, 지위 밖으로 나오는 것을 혐의하지 아니하고 다 진술하여 숨기는 바가 없었다. 스스로 국가의 일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국가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긴 허조. 그가 그렇게 당당하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사사로움이 아니라 공의로운 마음으로 나랏일에 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종은 18년 3월 28일자 기사에서 나라가 잘 다스려진 것은 허조와 같은 신하를 하늘이 내려주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100일에 맞았습니다. 옳은 일은 옳다 하고 잘못된 일은 그르다고 말할 줄 아는 허조와 같은 인물이 정부 내에 몇 명이나 될까요. ‘밝은 임금[明主]은 간(諫)함을 막지 않고 듣는 것을 넓히며,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곧은 말을 한다.’(태종실록 09/12/17)는 실록의 구절에서 국정운영의 지혜를 찾아보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