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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리 안에 굶는 사람 없게 하라" 가훈6條 실천한 '積善之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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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리 안에 굶는 사람 없게 하라" 가훈6條 실천한 '積善之家'

[한국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4] 경주 최부잣집 교동 종택

"안동 임청각 주인 석주 이상용 선생 집 담보로 독립운동 자금 빌려가


사정 어려워져 집 팔려할 때 선조가 그 자리에서 집 문서 찢어 버려


밥 굶는 사람들 배려 구례 운조루와 같이 섬돌 밑으로 수평 굴뚝 내


전재산 헌납해 만든 대학, 박정희 개인 수중에…조상들에 면목없어"

▲경주최부잣집주손최염선생
▲경주최부잣집주손최염선생
[글로벌이코노믹=김영조 문화전문기자] 한국사람 치고 경주 최부잣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최부잣집은 한국 종가 가운데 나눔을 실천한 가장 대표적인 종가로 꼽힌다. 하지만, 최부잣집을 아는 사람들도 진정 그 속내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좀 더 깊이 있는 나눔의 삶을 확인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곳을 취재하려면 경주와 서울 두 곳을 찾아야만 한다.

원래 최부잣집 종택은 경주시 교동에 있으며, 주손(이 종가는 특히 종손이 아니라 주손이라 한다) 최염(81) 선생은 수도권에 살고 있고,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사무실(경주최씨중앙종친회 회장)이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

먼저 종택을 찾아 사진을 찍고 종택을 관리하고 있는 최용부 선생을 찾아보기로 했다. 찾아간 날은 여름 기운이 완연한 6월 1일이었다. 기다렸다 반갑게 맞아주는 최용부 선생은 자신을 종택 관리인이면서 경주광광지킴이로 소개한다. 경주를 아끼는 시민으로 경주 관광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 고쳐나가도록 언론기고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경주사랑 정신과 시민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곳에는 하루 관람객 천여 명이 옵니다. 전에 견주어 배 정도 늘었는데 그것은 이곳 옆 문천(蚊川)에 놓였던 월정교(月淨橋·통일신라시대 다리) 복원과 교촌한옥마을 조성 덕분이지요. 이제 ‘경주최부자아카데미’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데 그것이 완공되면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을 것입니다.”

▲경주최부잣집대문에서본바깥풍경
▲경주최부잣집대문에서본바깥풍경
최부잣집을 찾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불국사나 석굴암은 역사유적으로 그 가치가 크지만 그저 보고 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느끼고 가야하는 곳이기에 그 의미는 자못 크겠지요. 이제 최부자 정신을 더 깊이 알릴 ‘경주최부자아카데미’는 그런 느낌을 더욱 증폭시켜주지 않을까요?
얼마 전 포스코는 사내 교육에서 ‘경주 최부자를 알자’라는 주제로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최부잣집 가훈이 기업 경영 기법과 일치함을 확인했습니다. 예를 들면 ‘며느리가 시집오면 삼년동안 무명옷을 입어라’라고 했다는 것은 바로 원가절감이 아닐까요? 그밖에도 가훈에는 노무관리, 생산관리 등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최용부 선생은 유타대학교 대학원장이 와서 보고는 최부잣집 가훈은 기업경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인정했다는 말과 관람객이 나가면서 “이 정신은 기업 총수들이 알아야 한다.”라고 했고, 한 경주시민은 “그동안 경주는 불국사, 석굴암만 알지만, 왜 최부잣집을 이용하지 않느냐?”며 안타까워했다는 말까지 했다. 최 선생은 최부잣집 가훈에 푹 빠진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이곳에서 7년을 근무하면서 가훈의 중요성을 강조하다보니 근검절약 같은 정신에 스스로 최면이 됩니다. 나아가 최면에서 동화까지 이어진다고 할까요?”라는 말까지 내뱉는다.

▲곳간
▲곳간
종택을 골고루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는데 연신 관람객들은 몰려든다. 저 많은 사람들이 이 종가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최부잣집의 정신을 드러내는 집 구조가 하나 보인다. 구례 운조루에서 보았던 섬돌 밑으로 낸 수평굴뚝이다. 밥 짓는 연기가 끼니를 잇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상처가 될까봐 연기가 아래로 기게 만든 기막힌 나눔의 구조다.

갈 길이 먼 기자는 서둘러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온다. 그리곤 며칠 뒤 주손 최염 선생을 경주최씨중앙종친회 사무실로 찾아뵈었다. 연세가 81세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정정하면서도 온화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는다.

이전 취재로 안동 임청각을 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임청각과의 인연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내가 아는 한 언론인이 전에 임청각을 취재했을 때 임청각 종손이 했다는 증언을 들려주었습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이 집문서를 담보로 잡고 최준 할아버님께 독립자금을 빌려갔는데 나중에 어려워져 집을 팔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당시 할아버님은 집문서를 찢으면서 없던 일로 했다는 것이에요. 나는 선대 어른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한 마음으로 뭉쳤으니까 후손들도 한 마음으로 왕래해야 할 것이라며 그 언론인에게 같이 가자고 했어요.”

▲쌀이없어밥을해먹을수없는가난한이들을위해연기가밑으로기게만든수평굴뚝.
▲쌀이없어밥을해먹을수없는가난한이들을위해연기가밑으로기게만든수평굴뚝.
아 어찌 감동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런데 주손 최 선생은 할아버지 최준 선생도 독립자금을 댔다는 얘기를 해준다.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통해서 상품을 보내 돈이 되면 상해임시정부로 보냈습니다. 그때 부동산을 팔아서 독립자금을 대면 눈이 벌갰던 일제에 걸려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기업들이 자금을 외국으로 빼돌리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백산상회는 식산은행에서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독립자금을 보냈는데 대출금이 담보금을 넘어가자 경매처분을 해야 할 정도가 되었지요. 하지만 총독부에서 최부잣집을 망하게 하면 문제가 심각해지니까 대신 장기분할상환으로 하도록 말렸다고 합니다.”

그렇다. 석주 선생처럼 만주로 떠났다면 모를까. 나라 안에서 독립자금을 대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식산은행이 최부잣집을 봐준 것은 친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는 의혹이 일었다. 하지만, 해방 뒤 백범 선생이 이를 해명해주어 분명히 독립자금을 댄 것이지 친일을 하지 않았음을 확인해주었다고 한다.

선생은 말한다. “그때 이미 이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나중에 교육사업에 모두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명료대는불을밝히는등대로에전관가에나있었다.
▲명료대는불을밝히는등대로에전관가에나있었다.
문제는 재산을 모두 내놔 시작된 교육사업이 개인 수중에 들어간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최준 할아버님과 지역의 유지들이 하나 되어 시작한 교육사업이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주(校主, 선생은 설립자도 아닌 사람이 없던 용어까지 만들었다고 강조했다.)가 되면서 할아버님의 뜻이 망가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최부잣집이 부자가 된 사연은 어떤 것인가요?”

이것도 역시 기자에게 궁금한 것의 하나였다. 주손은 거침없이 말한다.

“처음엔 그렇게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국자 선자 10대 할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거친 땅을 개척하여 재산을 늘렸고, 또 이앙법을 새롭게 도입해 이모작을 함으로써 또한 재산을 늘렸지요. 게다가 당시는 섣달만 되면 양식이 떨어져서 가난한 이들은 장리를 얻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여유분의 곡식으로 장리를 놓았던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사당
▲사당
그 뒤 명화적패(횃불을 들고 도적질을 하던 패거리) 공격을 받은 뒤 혼자 부자 되려고 한다고 부자 되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고, 소작료를 반으로 낮췄는데 이에 주변 지주들의 항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때 급하게 땅을 팔려는 사람의 정보를 할아버지에게만 가져오면 그 사람에게 역시 소작료를 반만 받으니 모두가 할아버지에게만 정보를 가져왔고, 결국 이때 급격히 재산이 늘어난 것입니다.”

주손은 이에 한 가지 덧붙였는데 가훈으로 수확량이 만석이 넘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만석에 다다를 것 같으면 소작료를 더 낮췄다고 했다. 또 요즘으로 치면 ‘적대적 M&A’ 곧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해서 치부하는 것을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흔히 부자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지만 이는 우리 종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직하게 돈을 버는 것은 우선 단기적으로 볼 때는 손해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론 훨씬 큰 이익임을 우리 집안은 확신한 것이지요.”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정무공 종가의 고문헌 3000여 점을 기탁 받아 분석한 결과 ▶노비나 소작인의 빚 탕감 청원에 답하는 문서 ▶병자호란에서 전사한 충노(忠奴)를 표창해 달라는 요청서 ▶노비 반란을 겪은 뒤 타협책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문서 등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발전사 연구에 귀중한 고문헌 수십 점을 찾았다고 밝혔다.

▲전사노비표창을요청하는상서
▲전사노비표창을요청하는상서
“이 몸이 이 고장에 흘러 들어와 땅 없이 빌어먹다가 서원에서 살게 해주어 서원의 종이 되었습니다. 서원의 별고(別庫·별도의 창고)에서 장리(長利·통상 연 5할의 이자) 벼 1석을 받아먹고 원금 1석은 그해 서원에 납부했으나 나머지 7두 5승은 아직 납부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유를 헤아리신 뒤 빚을 깎아주시기 바랍니다.”

위는 이번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내놓은 고문서 중의 하나에서 나온 내용으로 1710년 경주 용산서원에서 일하던 노비가 원장에게 올린 청원서의 일부다. 용산서원은 경주 최씨 중시조인 최진립의 위패를 모셔놓고 직접 운영한 서원이다. 원장은 이 청원에 “형세가 대단히 가련하므로 빚을 탕감해준다”고 결정했다. 이 서원은 일종의 조사위원회인 ‘사핵소(査覈所)’를 만들어 빚 진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하는 까닭이 타당하면 빚을 깎아줬다. 나라가 아닌 서원에서 제도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구한 셈이다.

지금도 구전되는 ‘마당쓸기’와 관계된 일화는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뜻하는 바가 크다. 곧 최부잣집은 마을에서 누군가 양식이 떨어지면 이른 새벽에 최부잣집에 가서 마당을 쓸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면 최부잣집에서 누가 마당을 쓸었는지 은밀하게 알아내 먹을 양식을 보냈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양식 얻기가 어려웠던 가장의 체면도 살리고, 자존심도 상하지 않게 도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종택전경
▲종택전경
경주 최부잣집이 자리한 곳은 명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 명당 연구가는 음택(묘지)은 여러 대를 가지만 양택(집)은 당대에 그 복이 그친다고 했다. 다만 스스로 복을 지으면 그 기운은 여러 대 동안 끊이지 않는데 이 경주 최부잣집이야말로 그 대표적인 집이다.

이 종가의 다음과 같은 가훈은 최부잣집이 어떻게 복을 지어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 절대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2. 재산은 1년에 1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3.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4.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매입하지 말라

5.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염 주손을 만나고 나오면서 승강기까지 배웅 나와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모습에서 훈훈한 이웃 할아버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랫동안 이어왔던 나눔의 정신이 배어 있음인가? 기자는 이분들의 곁에만 있어도 절로 행복해진다는 것을 절감하고 또 절감하면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