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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신앙의 성지 양양 낙산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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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신앙의 성지 양양 낙산사를 찾아서

천년고찰 낙산사, 우리 모두의 것

[글로벌이코노믹=윤지영 기자] “5년 전 산불의 잿더미를 이겨내고 가람이 복원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예전처럼 수많은 땀과 정성이 함께했습니다. 더불어 그 과정에서 많은 기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정리하면서 낙산사지를 다시금 챙겨보게 되었지요. 현직 주지만 이렇게 힘들었던 것은 아니라 과거의 모든 주지들이 그렇게 힘들게 가람을 중수 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 낙산사의 전 주지였던 정념 스님은 《신낙산사, 2011》 책 머리말에서 그렇게 말했는데 이는 불사(佛事)의 어려움을 잘 말해주는 것이리라. 의상스님이 창건한 절 낙산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관음신앙성지로 알려져 있다. 창건시기부터 오늘날까지 돈독한 관음신앙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충만한 절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이 창건이후 고려시대까지의 역사 기록이 빈약한데 견주어 낙산사는 조선왕조실록100여건의 기록이 남아 있다. 유교를 이념으로 하던 조선사회에서 낙산사에 대해 이렇게 많은 기록을 남긴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던 일이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은 진평왕 47년인 625년에 태어나 선덕왕, 진덕왕,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효소왕 등 격동의 왕조를 거쳐 성덕왕 원년인 702년에 입적했던 고승이다. 이 시기는 백제와 고구려의 병합, 두 나라 부흥군의 정리, 당군 축출과 대동강 원산만 이남 지역의 확보와 같은 정치적 격변기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상 스님은 원효 스님과 함께 고구려 보덕 스님의 제자가 되어 불법(不法)을 배우고 당나라로 유학하여 10여 년간 화엄학을 배워 귀국 했다. 이후 양양에 낙산사를 세워 동양최초의 관음신앙의 성지를 만든 뒤 수행과 학문을 겸비한 큰스님으로 오늘날 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스님의 자리에 올라있다. 서기 786년에도 낙산사에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 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버렸는데 70년 뒤인 858년에 범일국사가 중창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고려시대 몽골군에 의한 수난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범일스님이 정취보살을 조성 한 뒤) 백년이 지났다. 언제인가 들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져왔으나 오직 관음, 정취 두 성인을 모신 불전(佛殿)만은 화재를 면했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버렸다. 몽고의 병란이 있은 뒤인 계축, 갑인 연간(1253~1254)에 두 성인의 참 모습과 두 보주를 양주성(지금의 강원도 양양) 지역으로 옮겼다. 몽고군이 몹시 급하게 공격하여 장차 성이 함락되려 하므로 당시 주지인 선사 아행 스님은 은으로 만든 합에 두 보주를 넣어 가지고 피난하려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 두 불상은 몽고군에게 빼앗긴 것으로 낙산사는 보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고려시대의 대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낙산관음복장수보문병송>이라는 글에 상세하게 실려 있. “말들 하기를 넓은 동해 바닷가에 있는 낙산에 경치가 빼어난 한 곳이 있는데 청정하고 티끌이 없어 수월관음보살께서 빛나는 넉넉한 모습으로 머문다고 한다. 슬프도다! 멀리 있던 저 어리석고 못된 오랑캐가 무지막지하게 노략질을 하니 절과 불상들도 훼손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몽고군의 침입에 입은 낙산사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한번 해안 높은 곳에 올라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오래된 번뇌 없어지누나
관음보살의 원통한 이치를 알고자 한다면
성낸 파도 산 밑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어 보시길
이 시는 고려의 문신인 김부의(1079~1136)가 지은 시이다. 뿐만 아니라 낙산사에는 김극기, 안축 등 고려시대의 문신을 비롯하여 허균, 김홍도 등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갔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가 낙산사에 커다란 관심을 보여 봄과 가을에 걸쳐 신하를 파견하여 재를 올리도록 했으며 그가 태상왕으로 물러난 뒤인 1399(정종 1) 낙산사에 행차하여 능업법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이후 세조는 (1466, 세조 12) 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낙산사가 많이 퇴락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중창불사를 왕실차원에서 지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조시대 이후 불교의 탄압이 심해져 낙산사에 부과된 각종 특혜가 사라지고 낙산사는 초라한 몰골로 남게 된다. 낙산사와 인연이 깊은 사람으로 허균(1569~1618)을 들 수 있는데 그는 3년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임진왜란 때 피난 중에 첫아들을 출산한 뒤 산후조리를 못한 아내와 아들을 잃고는 이곳에 와서 머물면서 불교공부와 마음의 휴식을 취했다. 그러면서 그는 낙산사에서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아 1594229일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관료사회로 나온 이래 낙산사를 물심양면으로 돕게 된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그리고 근대에 이르는 동안 낙산사의 변화는 어떠했을까? 일제강점기때 낙산사의 변화는 특별히 찾아 볼 수 없다. 숭유억불의 조선사회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500년 동안 비판받고 핍박받아 온 불교가 단기간에 기력을 회복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며 특히 일제의 억압으로 관음신앙 성지의 위상을 되찾는다든지 조선시대 대표적인 호법도량으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는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을 맞았다. 기록에 따르면 1920년대까지 낙산사에는 100여 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마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거듭되는 불사와 중창을 한 끝에 오늘 날의 모습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신라의 의상대사가 관음성지로 창건한 이래 오랫동안 민중에게 사랑을 받아오던 낙산사는 20054월 봄에 동해 산불로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전 국민의 성원에 힘입어 다시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었다. 이는 관음신앙을 지키려는 사승(寺僧)들과 불자들의 염원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이다라고 신흥사 조실 무산 오현 스님은 신낙산사발간사에서 국민의 성원을 강조 했듯이 낙산사는 불교도들만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동해 푸른 바다를 찾는 사람이라면 내외국인 할 것 없이 양양의 낙산사를 찾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천년고찰 낙산사가 큰 화마를 딛고 일어나 다시 중생들의 사랑을 받는 관음성지로서 원래 자리를 찾아 가고 있음에 낙산사를 둘러본 기자의 마음도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