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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금의 소통, 지금은 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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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금의 소통, 지금은 왜 없을까?

[실록으로 배우는 소통 10] 조선 임금의 구언(求言)에서 배워라

[글로벌이코노믹=김기섭 기자] 조선시대에서 나라에 재앙이 생기거나 국정을 펴는데 필요할 경우, 임금은 현실정치에 대한 잘못과 민폐에 대해 의견을 가감 없이 청취하곤 했습니다. 구언(求言)이란 제도가 그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정사에 필요한 바르고 아름다운 말을 구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나라의 재변(災變)은 하늘로부터 견책을 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임금은 스스로 통치행위의 문제점을 되돌아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상향식 여론수렴제도인 구언을 활용한 것입니다.
재이가 발생하면 우선 임금은 국정 전반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한다는 차원에서 관료를 비롯하여 지방의 유림들, 심지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도록 이른바 구언전지를 내립니다. 그러면 응지상소(應旨上疏)라고 하여, 신하와 백성들은 상소를 통해 자신의 뜻과 생각을 개진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응지상소 만큼은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임금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검열과정이 생략된 밀서(密書)인 셈입니다.
임금은 일일이 상소를 읽어보고 내용이 적절하다 싶으면 정책에 반영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습니다. 구언제도는 삼국시대에서부터 그 흔적이 보입니다만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 매우 활발하게 운용됩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재이(災異) 관련 기록이 각각 1492건, 1969건이고, 구언은 각각 1247건, 1299건이 나옵니다. 재이와 구언이 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 제도가 지속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언에 적극적인 세종, “거리낌 없이 마음껏 직언하라” ▲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부처님 귀 조형물
태종은 구언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고 애쓴 임금 가운데 한 명입니다. 재임 기간 수재와 한재가 겹친데다가 바닷물이 붉게 변하는 등 재변이 속출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구언에 의지하여 정사를 펴고 있습니다. 특히 구언의 내용이 절실하고 구체적인 것이 특징인데, 태종실록 3년 8월 21일자의 기사가 좋은 예입니다. “내가 심히 두려워하여 못[]에 떨어질 것만 같다.-―덕행(德行)이 부족한데도 스스로 알지 못함인가, 정사가 잘못되고 있는데도 망령되게 행해지는가, 송사가 공평하지 못해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펴지 못함인가, 부역(賦役)이 고르지 못하여 도망치게 하는가, 참소하고 아첨이 행해지는가, 기강이 서지 못하여 형벌과 상()이 문란한가?-― 아아! 대소신료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노대신)들은 재앙을 부른 연유와 없애는 방도를 숨김없이 말하라.”
태종은 이렇게 구언전지를 내리고, 쓸 만한 말이면 받아들이고 혹 맞지 않더라도 관대히 용납하겠다고 덧붙입니다. 말을 구[求言]하여 슬기로움을 넓히고, 바른 생각을 듣기 원한 것입니다. 세종 역시 여러 차례 구언을 통해 바른 말을 구하는데 적극적입니다. 계속하여 가뭄이 들자 모든 책임과 죄는 자신에게 있다며 “마음이 아프고 낯이 없어서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합니다. 충직한 말을 듣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 조화로운 기운을 회복하고자 하니 직언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대소 신료들은 제각기 위로 나의 잘못과 정치의 그릇된 것과, 아래 백성들의 좋고 나쁨을 거리낌 없이 마음껏 직언(直言)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나의 지극한 생각에 부응하게 하라.” (세종실록 05/04/25)
구언전지를 받은 신하들은 소신껏 자신의 뜻과 생각을 응지상소에 담습니다. 신하들의 대책은 때로는 매섭고 날카롭기 그지없습니다. 이때는 임금의 잘못과 허물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국정문제를 건드리기도 하고 임금을 부드럽게 타이르기도 합니다.
조선 초 태조가 구언을 요청하자 간관인 전백영이 상소를 올리는데, 그 내용이 원론적이지만 매우 인상적입니다.(태조실록 3년 8월 2일) 전백영은 옛 책을 이용하여 “백성은 어린애 보호하듯 해야” 하며, “백성의 힘을 쓰되 3일을 지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뒤, 지금 두 도성의 역사를 일으키니 백성이 괴롭다며 순위를 정해 할 것을 청합니다.
또한 태평성대를 위해 경연을 열어 경전과 사기를 토론하고, 옛 일을 스승으로 삼아 정치를 하라고 조언합니다. 또 그는 《상서(尙書)》를 인용하면서 우() 임금은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며, 아래로는 농부에 이르기까지 숨김없이 말하게 하여, 옳은 말은 쓰고 옳지 못한 말을 했더라도 죄를 주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상향식 소통방식인 구언(求言), 지금 정치권이 따라야
그러나 구언제도가 모두 성공적으로 운용된 것은 아닙니다. 임금이 구언을 받아들이는 스타일이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소통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임금과 신하의 소통 창구로 유효했지만, 중종 이후 ‘지엽말단적인 절차’일 뿐이라며 평가절하되기도 했습니다.
임금이 구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가상한 일이다’ ‘유념하겠다’ ‘채용하겠다’라고 형식적으로 답변하거나 진언을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그 예입니다. 현종 때는 더 심하여 조정의 인사들이 숨을 죽이고 입을 다물 뿐 아니라 유생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위엄에 겁이 나서 휩쓸리는 바람에 초야에 있는 한 가닥 공론마저도 집안에서 말하는 사담으로 그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현종개수실록 8년 2월 갑술조)
그뿐 아니라 응지상소의 내용도 구체성이 떨어지고 추상적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임금 개인의 허물을 지적하거나 정책과 민생에 대한 실책을 지적하기는커녕 ‘선행에 힘써라’, ‘현량을 등용하라’ 와 같이 뻔 한 해결책만을 제시한 것입니다. 정조는 이 같은 상소에 대해 평범한 말만 열거하고 소략하고 긴요한 뜻이 없다며 구태의연한 신하들의 구언을 비판합니다.(정조실록 22년 1월)
그럼에도 구언제도는 아랫사람의 뜻이 위로 올라가는 하정상달(下情上達) 정치의 아름다운 전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재변, 재이를 극복하기 위한 임금의 방편이라 할지라도, 상향식 소통을 통해 국가적 문제를 국민의 통합적인 힘의 결집으로 해결하려는 의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감하고 혹독한 비판과 고언을 했음에도 처벌받지 않고 임금에게 직접 전하도록 한 구언의 전통은 조선을 만든 힘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 이 전통은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구언의 소통방식은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정치로 불통과 갈등을 양산하는 우리의 정치권이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리낌 없는 비판과 직언을 듣고 자신을 되돌아봤던 조선시대 임금의 바른 마음가짐[正心; 修省], 그 정심을 본받을 때 정치도 경제도 민생문제도 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