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들어가며(고산자식 환경지리부도 만든다)
20. 교통과 우정의 복합 체계: 역원(驛院) 제도
30. 오리고장 파발 찾기 (용인의 경우)
40. 디지털 지도 이용법
50. 남북한 통합 봉수 파발지도 만들기
부록 고산자 선생근대 통신과 우편제도가 도입되기 이전, 우리나라에는 봉수(烽燧)제도와 우역(郵驛)제도가 있었다. 봉수(봉수)란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이용하여 급한 사정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오늘날 ‘통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으며, 우역제도는 말을 타거나 걸어서 긴급한 국사(國事)를 전달하는 제도로서 우편제도의 원조에 해당된다.. 우역에서 우(郵)는 걸어서 전하는 것이고 역(驛)은 수레에 싣고 전하는 것이고 전명(傳命)은 역마를 이용하는 제도이다. ≪삼국사기≫에 우리나라 우역제도에 관한 첫 기록이 나온다. “비로소 사방에 우역을 두고 소사에 명하여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공식적 기록이고 그 이전 고대 사회에서 국가가 성립되는 시기에 우역과 역마 파발제도 있었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많다. 그것은 기마 유습과 수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와 고구려의 기마습속은 사실 유사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북방민족 계동의 공동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은 훈족과 흉노족 무사들이 뒤로 활 쏘는 장면이며 신라 무사는 솥단지를 싣고 다닌다. 훈족도 마찬가지였다. 덕흥리 무덤 그림에서 소가 가마 수례를 끄는 장면이 나오는데 춤 무덤 그림에서 말과 소의역할이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말보다는 소를 운송 수단으로 사용 했다. 이는 속도보다는 안전성에서 소가 더 적합하다는 점이다. 정교한 수레가 짐을 싣고 기다리고 사냥은 발로 하고 있다 말과 소의 역할 분당이 느껴지는 재목이다. 오호분 4호묘에는 수레바퀴의 신이 그려 있다. 강성 고구려의 저력은 이런 수레와 기마의 발달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런 저력이 고구려를 강성대국으로 지탱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 벽 그림들은 중국과 북에서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했다. 백제의 경우에도 고대국가의 성립과 발전이 신라보다 빨랐으며 중국의 제도와 문물의 도입이 활발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역시 신라보다 앞서 우역제도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호족세력을 흡수 통합하여 귀족정치체제를 수립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하는 우역제를 갖추게 되었다. 구제적으로는 6과 22역도 체제였다. 중기 이후에는 원 나라의 영향으로 역참과 같이 통신기관이면서 동시에 행정기구로 변모했다. 원나라의 우역제도는 말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잘 나타나 있다.“수도에서 많은 도로가 각 지방을 향하여 나 있다. 각각의 도로에는 행선지의 이름을 따서 명칭이 붙어 있다. 칸은 사신들이 이 도로를 통행할 때 필요한 문자는 무엇이든 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있다. … 국내 여러 지방으로 통하는 주요 도로에는 25~30마일마다 역참이 배치되어 있다. 이 역참에는 넓고 근사한 침대가 비치되어 있고 모든 필요한 물건들이 제공된다. 또한 각 역참에는 300~400마리의 말이 사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러한 시설을 칸의 명령이 행해지는 모든 지방과 왕국에 갖추어져 있다.” 고려 말 사회혼란으로 인해 역제가 크게 문란해졌다. 관료들이 개인적으로 이용했고, 이로 인해 부담이 커진 역리들이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공양왕 때 조준(趙浚)의 건의로 역마다 6품관을 역승(驛丞)으로 임명하여 역을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이미 나라는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