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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사는 마법사가 아닌 셰르파와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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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사는 마법사가 아닌 셰르파와 같은 존재"

[한국의 맛]콘래드 서울 이승찬 부총주방장

성공위해 '배수진 치고 자신을 던진' 맛의 승부사


막노동 등 하다 요리소질 발견하고 무작정 伊유학


"요리는 돌고 돈다" 복고풍 음식에도 남다른 관심


대학강의 등 부수적 일 일체 않고 현재에만 충실

▲이승찬콘래드서울부총주방장
▲이승찬콘래드서울부총주방장
[글로벌이코노믹=노정용기자]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길보다는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택하기 마련이다. 편안한 길에서는 평범함을 누릴 수는 있겠지만 뭔가 특별한 걸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콘래드 서울 이승찬 부총주방장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본인 스스로를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채 벼랑 끝에서 인생의 승부수를 던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에 도전했으나 그는 보기좋게 낙방했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사나이의 세계를 맛본 그는 세상에 해병대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겠나, 싶어 막일 현장에 자신의 전 재산이기도 한 몸뚱이로 승부를 걸었다.

손에 얼마간의 돈이 주어지자 인생을 180도 변화시키기 위한 진짜 배수진을 쳤다. 단 한 마디도 모르는 낯선 이태리로 편도 티켓만 산채 무작정 밀라노로 달려갔다. 도착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현실에 절망한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았지만 배수진을 친 덕분에 언어와 음식과 싸워 이겨야만 했다. 지난 2012년 8월 오픈한 콘래드 서울의 이승찬 부총주방장을 만나 그의 남다른 승부사 기질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 주>

-이태리 밀라노 소재 IPCA는 어떤 학교인가요?

“밀라노에는 ALMA, ICIF, IPCA 등 세 개의 요리학교가 있어요. IPCA는 ‘Istituto per la Promozione della Cultura Alimentare’의 약자로 이태리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입니다. 제가 이 학교를 택한 것은 음식을 기초문화로 생각하고 음식을 부흥시킨다는 학교이름이 마음에 꼭 들어서이지요. 이태리인들은 음식을 단순한 먹거리로 인식하는 대신에 자국의 기초문화로 인식할 만큼 음식을 사랑하고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니 얼마나 멋진가요?”

-음식을 기초문화라고 강조하는 걸 볼 때 수업도 특별한 것 같은데….
“우선 가르치는 교수진이 특이했어요. 대개 현장을 떠난 교수들이 가르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본인 이름을 내걸고 레스토랑을 하는 분들로 교수진이 구성되어 있었어요. 현장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어서 생생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어떤 교수님은 젤라토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고, 어떤 교수님은 호숫가에서 정육점을 운영하시지요. 수업 과목은 전채요리, 스타치(파스타, 피자 등의 곡물요리), 디저트 등으로 세분화 되어 있어 자기 스케줄에 맞추어 수업을 듣습니다.”

-1997년 이태리로 유학을 떠날 때 집안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이태리 요리를 배우러 간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박사학위 받으러 간다면 몰라도 단지 요리를 배우러 가다니 ‘또라이’ 아니냐고 반대하셨어요. 당시 스파게티의 매력에 푹 빠진 저는 본토의 스파게티를 배우고 와서 가게를 차리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부모님은 요리하는 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신 데다가 유학 대상국을 이태리로 선택한 것에 대해 더더욱 못마땅하셨어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을 결심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이태리에 도착하고 보니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요리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학 코스를 밟아야 했고,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학 코스를 밟는 동료들을 보니 전부 기초가 되어 있었는데, 저는 솔직히 아무것도 몰랐어요. 당황한 어학원은 저를 따로 불러 반 년 동안 1대 1 교습을 해주었어요. 그제서야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했어요.”

-남보다 용기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남보다 겁이 더 많아요. 닥치면 열심히 하지만…. 도전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스스로 굴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미리 손을 썼어요. 비행기 표는 편도만 끊고, 이태리에 가기로 결정한 후 단시간인 23일만에 떠났어요. 영어와 이태리어를 한 마디도 못했기 때문에 우물쭈물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게 생겼어요. 그래서 무대뽀의 심정으로 일부러 저를 이태리에 던진 것이지요.”

외로움과 언어장벽과 인종차별을 겪으며 겉으로는 강한 척 해도 속으로는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사람이 속으로 운다는 말을 실감 못했지만 자신이 그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해병대를 지원해 군생활의 경험이면 모든 걸 이겨낼 것 같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는 그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

-어떻게 벙어리 신세를 면하셨나요?

“1대 1 개인교습을 받으니까 일취월장했어요. 현지인 대학생 2명과 함께 지내면서 대화가 많이 늘었고요. 특히 술을 마시니까 용기가 생겨 말도 술술 나오더라구요. 친구들이 제게 ‘어떻게 발음하든 외국인인 이상 이상하다. 그러니 앵무새처럼 따라하라’고 해요. 그때부터 다소 과장되게 말하면서 회화가 빨리 늘었어요.”

-조리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실력이 안 되어 전‧후기 대학 모두 떨어지고 나서 제 스스로 ‘너는 정신을 못 차린 놈이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빨리 군생활 마치고 사회에서 돈을 벌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대 후 가진 거라곤 튼튼한 육체밖에 없으니 야간에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낮에는 인력사무소에 가 막노동을 했어요. 집에서 숙식은 해결되었지만 군대에까지 갔다왔으니 독립생활을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어요. 막노동도 하고, 트럭운전도 하고, 나중에는 장사를 배우기 위해 광장시장의 원단 가게에서 일해보기도 했어요. 속된 말로 블루칼라들이 할 수 있는 단순한 일들은 다해본 셈이지요. 우연히 스파게티 레스토랑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요리에 대한 소질을 발견하고는 앞으로 조리사가 되어보자고 생각하고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이 부총주방장은 다소 우락부락한 성격임에도 항상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걸 좋아한다. 줄 맞추어져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요리와 잘 맞아떨어졌다. 장사에 대한 꿈과 가장 부합되는 아이템이 먹는 장사였다고 한다.

-먹는 장사를 꿈 꾼 이유가 있습니까?

“먹는 장사는 다른 장사와 달리 적은 자본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어른을 대상으로 한 장사는 자신이 없어 처음에는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문방구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 인천의 문방구에서 두 달간 일해보기도 했어요. 1994년 종로에 있는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일한 것이 조리사의 길로 이끌었어요. 요리에서 소스가 대단히 중요한데, 꼭 소스나 육수를 만들 때면 주방장이 나가 있으라고 해요. 당돌하게 ‘주방장님! 제게 소스 만드는 방법 좀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어요. ‘사실 나도 가르쳐주고 싶은데, 정확히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서 못 가르쳐준다’는 거예요. 뭐든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고, 이태리 본토에 가서 한번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당시 제 스스로 뭘 해도 잃을 게 없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열심히 일해 모아놓은 돈을 제 자신을 위해 써보자고 쿨하게 생각했지요.”

-이태리 유학을 다녀온 후에는 무엇을 했습니까?

“나폴레옹 제과점에서 운영하는 이태리 레스토랑(일 솔레)에서 일했어요. 2000년에는 청담동의 안나비니에서 일하다가 1년만에 주방장이 되었고, 리츠칼튼 호텔의 회장 사모님이 레스토랑에 모임 차 왔다가 제가 만든 음식이 마음에 든다며 스카우트 제의를 했어요. 줄곧 개인 레스토랑을 목표로 했기에 호텔보다는 레스토랑에서 경험과 기반을 쌓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선배들이 호텔에 가면 한식당, 양식당, 일식당, 중식당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고 보다 시야를 넓힐 수 있다고 권유했어요.”

2002년 9월 리츠칼튼호텔 부주방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라마다 르네상스호텔(2004년)과 파크 하얏트 서울(2005년~2012년)을 거쳐 지난 2012년 8월에 콘래드 서울로 옮겼다. 특히 파크 하얏트 서울에서 셰프 드 파티, 수석조리장, 주방장, 부총주방장을 두루 거쳤다.

“인터내셔널 호텔인 파크 하얏트 서울에서 조리사로서 진짜 많이 배우고 요리에 대한 눈을 떴어요. 외국 스태프가 많은데다가 제 위에 전부 외국인 셰프들이 줄줄이 있어서 하루하루가 엄청난 도전과 기회였어요. 호텔리어는 대개 120일을 쉬는데, 오픈하고 2년 동안은 매일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고 뛰어다니느라 절반을 더 일했어요. 제 스스로 감동할 때까지 배우고 창조하는 도전의 연속이었어요. 이태리를 갔다왔지만 영어는 한 마디도 못했는데,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 영어에 처음 도전했어요. 제보다 한 살 아래인 총주방장 조지오 파팔라도가 한국의 연예인과 염문을 뿌려 달아난 뒤 그 자리를 제가 물려받게 되었지요.”

외국인과의 생활은 영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이 부총주방장은 당시 ‘I am a boy.’인지, ‘I am the boy.’인지조차 구분을 못했고, 내가 왜 이렇게 바보처럼 살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에서 요리에 대한 열정만큼 영어에도 열정을 쏟아부어 지금은 영어 브리핑과 프리젠테이션을 원활하게 해낸다고 덧붙였다.

-조리사 생활에서 가장 큰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간부 조리사가 되고 보니 일반 조리사와는 달리 조리팀을 이끄는 동시에 식자재 등의 원가절감을 통해 회사가 돈을 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적은 돈으로 고효율을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도 품질은 회사가 요구하는 표준에 부합하도록 유지하는 게 가장 큰 어려운 점이에요.”

-콘래드 서울은 완전 오픈 키친으로 운영하고 계신데….

“전 직장인 파크 햐얏트 서울이 최초로 오픈 키친을 시도했다면, 콘래드 서울은 모든 레스토랑을 완전 오픈 키친으로 만든 유일한 호텔이에요. 레스토랑을 두 개의 섬으로 나누어 그 자리에서 만든 즉석 음식을 손님들에게 제공하고 있어요. 특히 중동이나 인도음식에 강점을 가지고 있어 중동과 인도와의 비즈니스를 하는 분들이 즐겨 찾는 것 같아요. 인도의 카레 요리는 감히 서울의 호텔에서 가장 잘한다고 자부합니다.”

-셰프님에게 조리란 무엇입니까?

“선배들이 처음 조리를 시작할 때 ‘네가 이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다른 일을 알아봐라. 조리사는 다른 어떤 일보다도 네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한다’고 조언을 해주었어요. 제가 모든 일을 경험해본 건 아니지만 조리는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이다 보니 열심히 해놓으면 남들보다 잘한다고 칭찬을 듣고, 그 칭찬이 저를 조리사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요리 스타일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처음에는 신기한 것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음식재료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마법을 부려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외국인 셰프와 일하면서 결국에는 ‘아, 요리사는 산악인이 히말라야를 오르게 하는 셰르파와 같은 직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마법이나 마술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재료를 손님이 편안하게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안내자가 되어야 해요. 고기나 생선 요리에 너무 많은 스킬이나 양념이 가미되는 건 질 낮은 요리입니다. ‘이 맛이 무슨 맛이야?’ 한다면 결코 좋은 요리가 될 수 없어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는다면?

“주방에서 일하면 땀을 뻘뻘 흘리게 되는데, 일이 끝난 후 샤워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 기분은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요? 후배들에게도 ‘우리는 이 맛에 일하는 거야’ 하고 말합니다.”

-요리의 세계에는 숨은 고수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자기만의 필살기가 필요한데, 셰프님의 필살기는 무엇인지요?

“셰프보다는 쿡으로서 가장 큰 강점은 이태리요리입니다. 이태리에서 공부한 탓도 있지만 제 정체성은 이태리음식에 있어요. 이태리요리에는 심플하고, 단순한 음식이 많은데, 사실 그게 더 만들기 힘들어요. 파스타가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프랑스 음식에 수프가 발달해 있다면, 이태리 음식은 싱싱한 야채로 만든 샐러드가 발달해 있어요. 이태리의 따뜻한 수프인 미네스트로네는 수프라기보다는 국물에 들어간 익은 야채를 먹는 게 포인트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창조경제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사실 요리 만큼 창조적인 일이 없을 텐데, 창조 요리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남들이 흔쾌히 동의할지는 모르지만 음식과 문화는 사이클을 그리며 옛 유행이 돌고 돌아옵니다. 짧은 시기만 살펴보면 창조가 의미 있지만 긴 시기를 보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창조보다는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조리기구가 나오면서 새 요리가 창조되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주방은 군대만큼 규율이 엄격하고 일사분란 해야 합니다. 주방을 어떻게 이끌고 계시는지요?

“현실을 잘 모르는 외부인이 보면 칼이나 불 등 위험한 걸 다루기 때문에 규율이 엄격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음식은 시간을 다투는 예술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손님들에게 최대한 신선할 때 내놓아야 하기에 마지막 순간에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규율과 엄격함이 필요해요.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 주방장의 욕심이 앞서 규율이 엄격해지는 것이지요.”

-가장 존경하는 셰프나 요리의 스승이 있다면….

“미슐랭 별 한 개를 가진 이태리 레스토랑의 리노 까사고가 제 요리의 스승입니다. 친부모처럼 각종 이태리 요리를 가르쳐주셨고,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대해주셨어요. 한국인 조리사로는 박준식 명인이 셰프의 역할과 업장의 매니저로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어요. 현재는 파크 하얏트 부산의 총주방장 스테파노 디 살포가 동갑내기로서 서로 멘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조리사로서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호텔에서 오래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요리를 시작하면서 꿈꾸었던 소박하나마 제 일을 하고 싶은 숙제가 남아 있어요. 그런데 이 자리(호텔 부총주방장)가 너무나 달콤한 나머지 목표를 포기할까봐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때도 저를 이태리에 던졌듯이 무작정 가게를 계약해 배수진을 치고 승부수를 띄워야지요. 오너 셰프가 되면 다시 글로벌이코노믹와 인터뷰 한번 해주세요.”

이승찬 부총주방장은 콘래드 서울이라는 특급호텔이 배경으로 있기에 수많은 유혹이 따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서 120% 투입하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유혹을 다 거절한다. 이 일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옆으로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최고의 조리사인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생의 중요한 승부처에서 자신의 모든 걸 투입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해온 이승찬 부총주방장. 언제 다시 승부수를 던져 오너셰프로 변신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