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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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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 고함"

광복군 출신 황갑수 애국지사의 삶

[글로벌이코노믹 =황명하 호주광복회장]


얼마 전 편집국에 호주 광복회장 황명하 씨로부터 편지 한통이 배달되었다. 편지 내용의 일부를 보면

“제 선친이 1944년 1월22일, 학병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후, 몇 달 만에 탈출하여 중국군 상위(대위)가 되어 한·중 연합군의 정보장교 시절에 쓴(44년 7월경) “일본인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이 있습니다. 일본군 진영에 살포하면서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일본군 내 한국 국적 사병들을 불러모으는데 쓰였던 것으로 원문은 일본어입니다.”로 시작되는 편지였다. 편지는 이어졌다.



“무엇보다 일본이 항복하고 광복을 맞이한 지도 68년을 맞이하지만 일본인들은 아직까지도 과거의 조선에 대한 엄청난 죄과 -강제 징용, 징병, 위안부, 억압, 학살 등등 - 에 대해 엎드려 사죄하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과는 커녕 말도 안 되는 독도 영유권 주장 등 한국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습니다. 선친의 글은 이제 지나간 역사로 간과될 하나의 성토문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가 없는 이 시대에 아직도 유효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에 황갑수 애국지사의 나라사랑 정신이 깃든 “일본인에게 고함”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주-




▲ 일본인에게 고함 일본어 원문 중 일부 오등(吾等)은 마침내 일본의 진영을 탈퇴하였다.그것은 일본과 관계있는 모든 것과 결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바라고 바라지 않고를 불문하고 출생과 더불어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고 일본적인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도 오히려 일본인 교사로부터 배운 은혜에 대한관념과 아름답고 평화스럽던 어린시절의 노래를 잊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반드시 훗날 세상 인심에 비추어 비판받을 일대사를 결행함에 이르러 깊이 사안(思案)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은 정이고 현실은 현실대로 어찌할 수 없는 극한에 도달하였다.

그것은 주관적 자각보다 객관적인 자극이 우리를 발분케 하였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생각건대 우리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반역아가 되게 하고 또 우리를 방랑자가 되게 한 원흉의 무리들은 묻지 않아도 세인이 지실(知悉)하는 바이다.

흉악무도한 일본의 군벌들은 민족의 꽃이요, 희망인 한국의 학도들을 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조선학도특별지원병이라는 미명아래 우리와는 하등의 대의명분도 서지 않는 죽음의 전장터로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 당시 우리 부모에게 안겨준 배신감과 절망감!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고 땅을 치면서 울래야 울 수도 없었던 그 절통한 심정에 대하여 뒤늦게나마 인간적인 동정지념을 나누려는 생각조차 없단 말인가?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지금 일본은 너무나도 전 세계의 원한을 사고 있는 것이다.세계 속에 고립하여 존립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여기에 더해서 대동아건설의 미명 하에 한국인과 한국인을, 중국인과 중국인을 서로 피 흘려 싸우게 하는 동족상잔의 극악한 음모를 목견하면서 우리의 분노는 뇌천(腦天)에 달함을 어찌하랴!

우리는 호남성 악양(岳陽)의 거리에서 군속 또는 종군간호부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강제 모집된 한국의 젊은 부녀자들과 만났을 때, 그녀들이 어떻게 약취 유괴되어위안부라고 조롱당하며 성의노예가 되어 각지로 끌려 다니면서 야수의 무리와 같은 일본병정에게 모멸당하고 있는가! 그 잔혹한 운명을 한탄하고 있었다.

또 형양(衡陽)의 거리에서는 멀리 동쪽 하늘을 시름없이 바라보면서 고국에 두고 온 처자를 생각하고 가슴을 치며, 내가 왜 이 이국땅에서 유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냐고 단장(斷腸)의 탄식을 하는 이른바 근로보국대원이라는 이름으로 사냥당해 온 근로자의 눈물도 보았다.

어찌 그뿐이랴! 일본본토의 여러 광산과 군수공장에서, 또 남방 각처의 밀림과 도서에서 혹사당하며 신음하는 수많은 동포들을 상기하며 이 암담한 심사를 어찌 하란 말인가?

통틀어 한국의 남자는 우유부단한 존재로, 또 그 부녀자는 음탕한 것으로 세계에 인상 지워졌다. 이것이 이른바 대동아전쟁이 한국인들에게 보답하는 총결산인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들은 결연히 일어나서 한국임시정부로 달려가 연합국과 결맹하여 신명을 바쳐 일본의 군벌들과 싸울 것을 결의했다.머지않아 그대들 본토에서도 이 대륙에서 감행하고 있는 전장의 잔인한 양상이 모두 연출될 것이다.

그러나 이쪽은 신사적일 것이며, 인류의 전사에 그 유례가 없는 일본군의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 비인도적 흉내는 있을 리 없으니 과히 염려할 것은 없는 것이다.그러나 인과응보에 관하여 불교신심이 두터운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일본인이여 세기의 재판을 기다리라!


광복군 출신 황갑수 애국지사는 누구인가?

▲ 학병에 징집되어 부모형제, 이화여전 출신의 아내와 결혼 8개월만에 이별사진을 찍음,이별을 앞두고 어머니는 많이 울어서 눈이 붓고, 장남이 사지로 떠나감에 모두 침통한 표정

황갑수 선생은 충남 연기출생(1921-2009)으로 서울 양정고보에서 민족사상이 투철한 김교신, 장지영 선생의 교화를 받은 뒤 1940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여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학구열이 높았던 황갑수 선생은 다시 같은 대학 경제학부에 재진학 중인 1944년 1월 20일 일제의 소위 <학도지원병>으로 일본 중지파견군(中支派遣軍)제 64사단 (7968부대)에 강제 입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강소(江蘇),하북(河北),하남(河南),호북(湖北)전선에 투입되었다가 호남성 장사(長沙)와 형양(衡陽)을 거쳐 침현양전향에서 학도병 출신 5명의 동지와 1944년 5월 18일 일본군부대에서 탈출하였다. 당시 고향의 가족들에게 피해를 줄 것을 우려해 황인덕이라는 이명(異名)을 쓰게 되었다.

탈출한 황갑수 선생 일행은 중국 중앙군침현경비사령부 오개산 전방초소에 접선하여 한중 연합군의 일원으로 중국군사위원회 제9전구 (호남성, 강소성 관할) 장관부에서 상위(上衛)로 종군하였다. 한중일어에 능통하여 정보 장교로 정보의 교환, 통역을 담당하였고 호남성 진주 유격전 등에 참전하였다. 당시 황갑수 선생은 “일본인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지어 일본군 진영에 살포하는 등 대일군특무공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5년 2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제 1지지대 제 3구 대창설요원으로 임명되어 부대 편성을 마치고 제 3분대장을 맡아 60여명의 동지들과 임무를 수행하였다.

▲ 1944년 1월 학병 입대전 아리따운 아내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

이후 호남성 장사지구 파견대장이 되어 대원들을 인솔하여 유양에 주둔하였다. 그곳에서 정보의 수집, 한적(韓籍)사병초모공작, 일본군 초소 습격, 대군염전사상고취 강연 등을 통해 육군의 사기앙양과 난민 선무 공작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종전 시에는 강서성 남창에 특파되어 일본군 무장해제 임무를 완수하고 1946년 6월 이범석 장군의 인솔로 환국하였다.

귀국 후에 교육, 금융계에 종사하다가 신진농사회를 조직하여 40여 년간 농춘의 근대화와 농협의 육성 발전에 헌신하였다.1982년부터 7년 동안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회 위원으로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연인원 4백만 명에게 족립정신 홍보강연을 하였다. 그 밖에도 여러 애국단체 임원으로 봉사하였고 광복회 경기도 지부장을 역임하였으며 1982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992년 모교로부터 자랑스런 양정인상을 수상하였다. ▲ 2003.9.23 - 백두산 정상(83세), 애국지사 오희옥, 오상근(전 광복회 충북지부장).

2005년 고향 충남 전의에 공적비가 건립되고 2007년 자서전 ‘전의 운주사 자락’이 발간되었다. 현재 호주 광복회장 황명하 씨는 황갑수 애국지사의 아들로 한민족의 긍지를 먼 이국땅에서 살려내고 있다.

▲ 충북 선산에 세워진 '일본인에게 고함'기념비, 친필 휘호 기념비





일본인에게 고(告)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