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實義救恤'…국난 땐 의병 일으키고 가난한 이 구제

공유
0

'實義救恤'…국난 땐 의병 일으키고 가난한 이 구제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9)] 경북 의성 사촌마을 김사원 만취당 종가

임진왜란‧무신란‧명성황후 시해 병신의병 때도 거병


'만석꾼' 巨富아닌 수십 마지기 논밭이 전부였음에도


곡식 꾸어가고 토지문서 가져오면 차용증서 찢어버려


후손 중 13명 대과 급제 불구 높은 벼슬한 사람 적어

▲430여년세월의만취당
▲430여년세월의만취당


[글로벌이코노믹=김영조 문화전문기자]

“송은공의 어진 자손이요 퇴계의 문도였네
만취당을 짓고 수양을 쌓았으니 옛날 만년송 언저리라
나를 알아주는 이 드물어도 품은 생각 손상되지 않았다네
후손에게 은혜 베풀었으니 그 성광 지금에 빛나도다”

▲만취당김사원의14세종손김희윤선생
▲만취당김사원의14세종손김희윤선생


위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만취당 김사원(金士元, 1539(중종 34)∼1601)의 묘갈명(墓碣銘, 묘비에 새겨진 죽은 사람의 행적과 인적 사항에 대한 글)이다. 대학자 채제공이 김사원 선생의 묘비에 새긴 글을 보면 김사원 선생이 어떤 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교통편도 불편한 경북 의성 사촌마을의 만취당(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만취당길 17)에 가는 날은 막바지 더위가 숨을 헐떡이게 했다. 하지만, 이웃에게 베푸는 마음이 하늘같았던 어른의 체취를 맡으러 가는 길을 더위 정도가 막을 수는 없었다.

김사원의 14세 종손 김희윤(金熙允) 선생은 온화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아준다. 경북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된 만취당(晩翠堂)은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 만취당 김사원(金士元)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582년(선조 12)에 지어 430여 년간 보존된 조선시대의 대청 건물이다. 무더움이 극에 달했지만 사방으로 열려 바람이 통하니 만취당은 한여름임을 잊게 해주는 선계였다.

“만취당 종가는 대단한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큰 나눔을 실천하지 못했지만, 종가의 정성을 다해 의를 실천하고 구휼하려 노력했습니다.” 대담을 지극히 겸손한 말로 시작했지만 김희윤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만취당은 만인이 본받아야할 종가임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조선은 의(義)의 나라였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문신ㆍ무신을 가리지 않고, 양반ㆍ백성이 따로 없이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물론 사촌마을 만취당 종가 사람들도 앞장섰다. 먼저 김사원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성정제장(義城整齊將)에 추대되었고, 두 동생 김사형(金士亨)과 김사정(金士貞)을 곽재우 의병장 휘하에서 싸웠다.

또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때는 김이중(金履中)이 부의장이 되고 40여명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1500년대전기에지은영귀정(경상북도문화재자료제234호)
▲1500년대전기에지은영귀정(경상북도문화재자료제234호)
▲만취당앞의500년된우물.그런데우물에는'연못'이란시가걸려있어문화재관리의엉뚱함을본다.
▲만취당앞의500년된우물.그런데우물에는'연못'이란시가걸려있어문화재관리의엉뚱함을본다.


그뿐만 아니라 구한말 명성황후가 시해된 다음해에 일어난 1896년 병신의병(丙申義兵) 때에는 김상종(金象鍾)이 의병대장에 추대되고, 김수담은 선봉장, 김수협은 관향장, 김수욱은 소모장 등을 맡아 사촌 온 마을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의를 실천한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조선 말기엔 온 마을에 기와집이 들어차 ‘영남의 와해(瓦海‧기와의 바다)라 불렸던 사촌마을은 병신의병 직후 일제가 이 마을의 거의 모든 기와집을 불태우면서 이름이 무색해져 버렸다. 또 한국전쟁 때도 화마가 스쳐갔다.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이 지역에서 미국 군인을 몇 명 죽인 뒤, 미군은 인민군을 찾는다며 화염방사기를 차에 싣고 다니며 쏘아 또 한 번 많은 기와·초가들이 불타 사라졌다. 결국 두 번 모두 외세에 의해 아름답던 “와해”는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다만 만취당과 후산정사 그리고 만취당 앞의 향나무만 온전하게 남았다. 사람들은 그나마 만취당이 살아남은 것은 평소에 인근백성에게 베풀었던 덕이라고들 말한다. 실제 만취당도 불태우려고 소나무 가지를 가져다놓고 불을 질렀는데 소나무 가지만 타고 만취당은 멀쩡했다.

만취당은 임진왜란 당시 굶주린 백성이 많았을 때 곡식을 내놓아 구휼했다. 더구나 부녀자 걸인이 오면 김사원 선생은 꼭 의관정제를 한 다음 구휼했다고 전한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김씨의창(金氏義倉‧김 씨의 의로운 창고)”이라 부를 만도 했다. 당시 만취당은 수천, 수만 석의 재산을 가진 부자도 아니고 고작 수십 마지기 논밭이 전부였지만 이마저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었다니 선생의 넓고 큰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만취당종택전경
▲만취당종택전경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난한 백성들은 봄에 식량을 꿔 먹고 가을에 수확을 하면 갚는 일이 예사였는데 당시 양반들은 이를 빌미로 토지를 빼앗기 일쑤였다. 하지만, 김사원 선생은 양식을 꾸러 오면 차용증을 쓰게 했는데 갚지 못하고 토지문서를 가져왔을 때는 그 자리서 차용증서를 찢어버렸다. 그러면서 “차용증을 쓴 것은 빌려간 곡식을 갚는데 게으르지 마라는 뜻이지 논밭을 뺏기 위함이 아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라고 위로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종손 김희윤 선생은 어렸을 적 일화를 들려주었다. “집 옆에는 초등학교가 있고 10분 거리에 중학교가 있지요. 그런데 홍수가 나면 개울 건넛마을 아이들이 집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으레 만취당에 와서 먹고 자고 갔지요. 당시 어머니는 비가 많이 오면 ‘건넛마을 아이들을 데려 오너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중학교 동무를 사이에선 ‘만취당에 하룻밤 잔 적이 없는 동무는 진정한 동무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선생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눔 실천이 생활화 됐던 집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화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취당 종가는 높은 벼슬을 하지 않았던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송은처사 김광수 선생은 진사 합격 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 연산군의 폭정을 보고 이 조정에서는 벼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낙향했다고 전한다. 이후 “벼슬을 탐하지 마라”는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또 김사원 선생은 퇴계 선생을 찾아가 공부하기를 청했을 때 스승이 주자(朱子)의 관선재 시를 써주면서 벼슬보다는 학문에 전념하기를 바라자 이후 스승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한 집안에서 대과 급제자가 3명이 나오면 대단한 문벌이라고 하는데 만취당가에서 대과 급제만 13명이 있었는데도 높은 벼슬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니 송은처사의 유훈은 잘 지켜진 셈이다.

▲명필석봉(石峯)한호(韓濩)가쓴만취당현판
▲명필석봉(石峯)한호(韓濩)가쓴만취당현판


▲병신의병대장김상종의격문(1896년)과병신창의실록
▲병신의병대장김상종의격문(1896년)과병신창의실록


물론 남인의 몰락과 함께 퇴계 안동권역에서는 높은 벼슬을 탐하지 않는 경향이 컸던 것도 영향이었다고 김희윤 선생은 귀띔한다.

사촌마을엔 다른 마을에선 보기 드문 인공 숲이 있다. 바로 “사촌가로숲”이 그것인데 입향조(入鄕祖‧마을에 맨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조상) 김자첨 어른이 터전을 잡았을 때 서쪽이 허해 그를 보하려고 인공으로 숲을 조성한 것이다. 당시에는 서쪽이 허하면 큰 인재가 나지 않는다는 풍수설이 있어 그를 비보하려 했으며 이와 더불어 바람을 막는 방풍의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방풍림 구실도 한 가로숲은 실제 숲 안쪽과 바깥쪽은 상당한 온도차를 만들어 주었다.

이곳 가로숲은 총면적 4만3519㎡(약 1만1817평), 문화재 지정면적 약 3만3862㎡(약 1만261평)에 이르는데 조사 결과 이 숲에는 나이 300~400년 되는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등이 34종 1500여 그루의 나무들이 있으며, 왜가리를 비롯하여 소쩍새, 황조롱이 등 20여 종의 새들이 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땅이름 등을 지을 때 보통 한자말을 쓰는데 견주어 이곳의 “가로숲”이란 이름은 길거리를 말하는 한자말 “가로(街路)”가 아니라 순수 토박이말이다. 좌우로 향하는 방향을 말하는 가로세로의 바로 그 “가로”인 것이다. 마을을 가로질러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굳이 가로 “횡(橫)”과 수풀 “림(林)”을 쓰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정감 있는 이름이 되었다.

▲천연기념물제405호사촌가로숲
▲천연기념물제405호사촌가로숲


만취당 앞에는 나이가 500년 정도 된 향나무가 서있다. 송은 김광수 선생이 나무를 심고 절조를 지킨다는 뜻으로 만년송(萬年松)이라 이름 지었다. 그 뒤 의성지역에 군수나 현감이 부임하면 만년송의 안부를 물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높은 벼슬도 하지 않았던 만취당 주인의 인품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향나무는 높이 8m, 둘레 2.2m인 자단향나무로 비교적 수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1995년 경상북도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경북 의성 사촌마을은 기와집이 많다는 뜻의 “와해”라는 이름이 무색해졌지만 정부의 지원으로 속속 옛 건물들이 복원이 되고 있다. 안동김씨 도평의공파 종택, 김사원 선생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지은 비지정건조물문화재 후산정사(後山精舍),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34호 영귀정, 비지정건조물문화재인 후송재 등 많은 문화재급 건물들이 있다.

대담 뒤 김희윤 선생은 자청하여 마을 곳곳의 문화재들을 안내하고 설명해주었다. 한여름 무더위를 아랑곳 하지 않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현 종손에게도 만취당의 나눔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한여름 대낮에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동안 나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되었지만 만취당을 소통하던 시원한 바람 한 줄기는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내 가슴에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