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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誦書ㆍ律唱은 전통사회 최고 공부법이자 인격수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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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誦書ㆍ律唱은 전통사회 최고 공부법이자 인격수양법"

[스페셜-유 창 서울전통문화예술진흥원 이사장]

선비들 방대한 고전 소리내어 읽는 송서는 훌륭한 책읽기


한시를 노래하는 율창 우리 선비문화의 대표적 성악 유산


경기민요 전수조교 명맥 끊길 위기 송서‧율창 맥잇기 앞장


국가문화재로 승격 후 인류문화유산으로 확장되었으면….

▲유창서울전통문화예술진흥원이사장/사진=윤나연기자
▲유창서울전통문화예술진흥원이사장/사진=윤나연기자
[글로벌이코노믹=노정용기자]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소리를 내어 외우고 풍류를 아는 선비라면 시 한수를 지어 읊조렸다. 벼슬길에 오른 사람만 그렇게 한 게 아니고 글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했다. ‘글읽기’의 전통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선비들은 논어와 맹자부터 주역에 이르기까지 그 방대한 학문과 시경과 서경을 쉽사리 머릿속에 외우고 있었다. 책도 쉽게 구할 수 없었고 컴퓨터도 없었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를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옛 선비들이 손쉽게 암송할 수 있었던 비결은 송서(誦書)와 율창(律唱) 덕분이었다.

송서는 소리를 내어 글을 읽는 것을 말하고, 율창은 한시를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 아름다운 전통은 훌륭한 공부법이자 인격수양법으로서 과거제도의 한 과목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600년 동안 내려온 이 아름다운 전통이 거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이때 한 청년이 나타났다. 경서도 소리에 입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수조교에 올랐던 유창(柳淌‧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1호 송서‧율창 예능보유자) 씨가 진로를 바꾸어 송서‧율창의 명맥을 잇기로 한 것이다. 보통의 선남선녀들이 꿈꾸는 가정을 꾸리는 것도 미룬 채 오로지 송서‧율창의 세계를 개척하며 송서‧율창의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서울전통문화예술진흥원 유창 이사장을 만나 새로운 유형의 ‘책읽기 운동’으로 확산이 가능한 송서‧율창의 세계에 대해 알아본다. <편집자 주>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송서‧율창에 대해 설명해주시죠?

“송서(誦書)란 고전이나 옛 소설과 같은 글을 읽을 때 밋밋하게 읽는 것이 아니라 높낮이를 조화롭게 연결하며 구성지게 낭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글공부 하던 선비들이 노래하듯 책을 읽음으로써 독서성에 음악성과 예술성을 가미한 게 송서라면, 율창(律唱)은 한시(漢詩)를 음악적으로 접근해 긴 가락에 올려 부르는 노래입니다. 다시 말해 송서와 율창은 우리 선비문화의 대표적인 성악 유산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유 이사장에 따르면 우리 전통의 성악 유산은 갑오경장 이후 쇠퇴를 거듭하다 6‧25이후에는 몇몇 소리꾼을 제외하고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선비라면 누구나 향유한 고급 대중문화가 손가락을 꼽을 정도의 소수문화로 퇴락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1930년대 송서를 익힌 이문원(李文源) 선생의 삼설기(三說記)나 짝타령 등이 묵계월 명창에게 전해졌다. 이와 함께 여러 편의 송서나 율창도 김월하, 묵계월, 김여란 등 당대 최고의 정가, 민요, 판소리의 명창들을 통해 전통을 간직하게 되었다. 만일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송서가 무엇이고 율창이 어떤 형태로 불렸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AD 372년)에 한문과 불교가 들어오면서 송서와 율창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송서와 율창은 고려시대를 거쳐 유학을 중시한 조선시대에 와서 꽃을 피웠어요. 특히 송서는 과거제도의 한 분야를 차지했는데, 과거 응시자는 음악을 가미한 송서를 통해 책 내용을 모두 암기했어요. 지역의 명기들도 선비 못지않게 송서와 율창을 익혀, 영흥기생은 용비어천가를, 안동기생은 대학을 줄줄 외웠다고 합니다.”

-송서‧율창이 조선시대에 꽃을 피운 이유가 있습니까?

“과거제도 덕분이지요. 선비들은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송서‧율창을 기본교양으로 익혔어요. 부잣집 사랑채에서는 선비들이 늘 모여 송서로 고전을 익혔고, 공부를 많이 한 기생들은 예술성을 가미해 공연을 선보였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익히기 어려운 논어 맹자 중용 등의 고전에다가 음률을 넣음으로써 쉽게 암기할 뿐만 아니라 내용을 더 잘 이해하게 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순전히 제 경험이지만 한 자리에 계속 앉아서 글을 읽다 보면 몸이 힘들고 지치기 쉬운데, 호흡을 중시하는 송서‧율창이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애기 울음소리, 다듬이 소리, 글 읽는 소리 등 세 가지 소리 가운데 손자의 글 읽는 소리를 으뜸으로 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어떤 처자는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너무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담을 뛰어넘었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어떻게 송서‧율창에 입문하게 되셨는지요?

“제게는 다른 국악인에 비해 스승이 참 많습니다. 평안도 출신으로 경기산타령, 서도산타령에 능한 박태여 선생(1979년)에게서 경서도 소리공부를 시작으로 황용주 선생(1981년)과 이은주 선생(1993년)에게서 경기소리를 공부했어요. 그런데 최종적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이문원 선생의 맥을 이은 묵계월 선생(1994년)께 삼설기와 12잡가를 전수 받고 본격적으로 송서‧율창의 세계에 뛰어들었어요. 국악계에서 출세의 보증수표라 할 수 있는 경기민요 전수조교(준 인간문화재)의 자리에까지 갔지만 다 포기했지요. 모두들 ‘송서‧율창은 따분한 소리다,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저는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어요. 스승인 묵계월 선생도 남자 선생에게서 송서‧율창을 이어받았으니 남자인 제가 이어가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사실 송서‧율창뿐만 아니라 경기민요에도 남자 소리꾼이 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이창배, 정득만, 최창남 선생 등 남자 소리꾼들이 경기민요의 판을 주물렀지만 현재는 거의 여자 소리꾼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국악판이 어렵다보니 남자 소리꾼이 지원을 하지 않는 까닭이다.

-경기민요에서 송서‧율창으로 갈아탈 때 갈등은 없었습니까?

“갈등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요. 쉬운 길을 버리고 가시밭길을 가는데, 왜 고민이 없었겠어요? 그러나 경기민요에서 인간문화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경기민요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서서 대를 이을 수 있는데 반해 송서‧율창은 제가 잇지 않으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더 절박했어요. 특히 송서 ‘삼설기(三說記)’의 경우 앞부분을 배운 제자는 있어도 끝까지 완창한 사람이 없었어요. 스승들이 살아계실 때 조금이라도 더 배워두어야 송서‧율창을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송서의 기본이 되는 ‘삼설기’는 세 선비가 저승에 가서 겪는 이야기다. 세 선비는 낮잠을 자다가 죽은 후 저승사자에게 이끌려 저승으로 가서 최 판관한테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잡혀왔으므로 저승에서는 이들을 도로 살려 보내며 그 대신에 소원 하나씩을 들어주기로 한다. 한 선비는 높은 벼슬을 달라고 하고, 또 한 선비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여 두 선비는 각기 소원을 이룬다. 하지만 마지막 선비는 인간으로서 모든 일을 다해보고 싶다는 어마어마한 소원을 말함으로써 염라대왕이 노발대발하며 사생길흉지권을 가진 나도 못할 것을 원한다고 꾸짖는다는 내용이다.

-송서와 율창의 대표적인 곡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송서의 대표적인 곡으로는 삼설기, 대학, 중용, 계자제서, 격몽요결, 명심보감, 춘야연도리원서 등이 있고, 율창에는 등왕각시, 효좌, 영남루시, 죽서루시, 강릉경포대시, 사임당 신씨 향수시, 만경대, 짝타령 등이 있어요.”

-현대에 송서‧율창을 복원해야 하는 까닭이 있다면….

“송서‧율창은 교육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청소년들의 정서 안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아이들의 인성을 고취시키기에 좋은 수단이 되고요. 무엇보다 책읽기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소리를 내어 읽는 송서나 노래하는 율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일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송서‧율창을 책읽기에 도입한다면 옛 선비의 글읽는 전통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되살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취지는 좋은데 바쁜 현대인에게 손쉽게 다가갈 방법은 있는지요?

“세월을 거쳐 오면서 잘 다듬어진 고전이 송서‧율창의 훌륭한 교재인 것은 틀림없지만, 현대 작품 가운데서도 좋은 글과 시들이 많습니다. 현대인의 구미에 맞는 글을 골라 창작을 하는 한편, 대중화의 일환으로 현재 국악방송을 통해 250문장, 1000자로 된 ‘천자문’을 가르치고 있어요. 시작할 때에는 누가 들을까, 하고 걱정을 많이 했지만, 청취자들로부터 송서‧율창을 배우고 싶다는 편지가 오고 있어 기대 이상입니다. 현대 창작에서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순 한글로 된 작품의 경우 옛 글을 송서‧율창을 할 때와 같은 맛이 안 납니다. 더욱 정진해 이 부분도 맛깔스럽게 만들어 나가야지요.”

-현재 송서‧율창을 배우고 있는 제자들은 많습니까?

“이수자가 50명이 넘고 전수생은 100여 명 됩니다. 송서‧율창의 명맥이 안 끊길 정도는 되었지만, 송서‧율창이 서울지역문화재에서 국가문화재로 격상이 되어 보다 활성화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재능 있는 제자들이 들어와 정식으로 예술고에 진학해 예인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창 이사장은 지난 2009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1호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앞서 전주대사습 민요부문 장원(1998), 전국 경서도창대회 대통령상(2000), 2003KBS국악대상 민요상(2003) 등을 수상했으며, 송서‧율창의 보급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 2012년 옥관문화훈장을 서훈했다.

-송서‧율창의 가치를 보면 지역문화재보다 국가적 차원의 문화재가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욕심이라기보다는 송서‧율창이 국가문화재가 된다면 전승‧보급이 훨씬 용이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강하게 추진하고 있어요. 송서‧율창이 600여년을 이어온 소중한 우리 민족의 성악유산이기에 국가 차원에서 널리 보급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국악의 현주소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주시죠?

“한류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지만 정작 우리 음악인 국악은 서양음악에 비해 홀대를 받고 있어요. 몇몇 인기 국악 장르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근근이 맥을 이어가는 정도이지요. 전체적으로 학교 교육에서 서양음악 위주로 교육되는 게 이 같은 국악의 위기를 가져왔어요. 국악이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해서는 실기인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송서‧율창을 꼭 반석에 올려놓을 작정입니다.”

-후학 양성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요?

“별 뾰족한 방법 없이 일주일 내내 온 몸으로 수업을 합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집중지도를 하고, 평일에는 일반인을 지도하고 있어요. 일반 학교에서처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쉴 틈 없이 다소 무리를 하고 있지만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할 때 몰아붙여야 해요. 못난 선생의 욕심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공부하려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지요.”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자들과 수업을 하며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올바른 인성을 가져 늘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말과 행동이 진실 되어야 한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으로 송서·율창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지요. 그런 마음이 송서‧율창 하는 사람의 자세이고 잘 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마디로 예기에 나오는 ‘온유돈후(溫柔敦厚‧부드럽고 온화하며 성실한 인품이나 시를 짓는 데 기묘하기보다 마음에서 우러난 정취(情趣)가 있음을 두고 이르는 말)’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송서‧율창의 유창 명인. 그가 현재 가장 바라고 있는 국가 인간문화재가 되어 한국의 송서와 중국의 전통명인 ‘삼국지’ 낭독자가 한판 진검승부를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