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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야기-28] 중화인민공화국의 세습체제, ‘마오쩌둥, 아들에게 중국을 물려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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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야기-28] 중화인민공화국의 세습체제, ‘마오쩌둥, 아들에게 중국을 물려주다’


1976년 병석에 누운 마오쩌둥(毛泽东)은 “나반셔, 워방신(你办事,我放心. 네가 하면, 안심이 된다)”이라는 여섯 글자를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서 가리키는 ‘니(你)’는 바로 ‘화궈펑(华国锋)’을 의미하며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밀지 한 장으로 중국의 최고 통치권자에 오르게 된다.

화궈펑은 1921년 산시(山西)성 자오청(交城)에서 출생해 17세가 되던 1938년 항일 게릴라전에 참가하면서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9년 남하하여 후난성(湖南省) 샹인현(湘陰縣) 당서기 겸 무장부대 정치위원. 1957년 후난성 당위원회 후보서기. 1958년 후난성 부성장. 그리고 1959년에 마오쩌둥에게 발탁되어 후난성 위원회 서기로 승진했다.

1971년 린뱌오(林彪) 사건으로 중앙으로 진출해 1973년 정치국원에 발탁됐으며, 1973년 당 제10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1975년 국무원 부총리 겸 공안부장.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사망 후 국무원 총리직 대행. 같은 해 4월 당 중앙위 제1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로 임명됐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숨진 다음달인 1976년 9월 군부 내 개혁파와 손잡고 문화대혁명(1966~1976년)을 종료시켰으며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ㆍ개방의 물꼬를 트는 데 길을 열어줬다. 1977년 10월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 등 사인방 체포를 전격 승인해 당 중앙위 주석, 당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 국무원 총리 등의 직책을 겸임하며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했다.

여기까지가 화궈펑의 대외적인 행로다. 그러나 가려진 그의 또 다른 인생 역정이 남아있다. “화궈펑(华国锋) 전 중국공산당 주석은 원래 마오쩌둥이 결혼하기 전 얻은 아들이다.”

1920년 마오쩌둥은 창사(长沙)에서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했고 성이 ‘야오(姚)’인 담배상인의 딸을 알게 됐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21년 이들 사이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마오쩌둥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을 물려받은 ‘화궈펑’이다. 그러나 화궈펑은 태어날 당시에는 정식 이름을 얻지 못했다.

1922년 10월 마오쩌둥은 본처인 양카이후이와의 사이에서 마오안잉(毛岸英)을 얻었다. 마오는 화궈펑과 마오안잉을 친척에게 맡겨 돌보게 했다. 몇 년 후 화궈펑은 산시성 타이위안(太原)으로 보내졌고, 이후 화(华)씨 성을 가진 친척에게 보내져 ‘화광주(华光祖)’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화청우(华成武)’로 개명했다가 국공내전 기간에 비로소 ‘화궈펑’이라는 정식 이름을 얻게 됐다.

중국공산당은 화궈펑의 진실을 오랫동안 비밀에 부쳤으며 마오안잉을 마오쩌둥의 장남으로 알려왔다. 그러나 마오안잉이 1950년 한국전쟁에 참가해 평안북도 동창군에서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사망하자 마오쩌둥은 화궈펑을 후계자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그의 유지에 따라 화궈펑은 중국을 움켜쥐게 된다. 그러나 화궈펑은 “마오 주석이 내린 결정을 굳게 지키고 마오 주석의 지시를 시종일관 받들어야 한다”는 이른바 ‘범시론(凡是論)’에 집착했고, 이를 틈타 실용주의 정책을 견지하던 개혁파인 덩샤오핑에 의해 권력투쟁에서 밀려났다.

결국 1980년 9월 총리직을 사임하고 뒤이어 1981년 6월에는 당 주석과 군사위 주석에서도 물러나 칩거에 들어갔다. 중국공산당 16대 직전 화궈펑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고 아버지 성인 마오(毛)나 어머니 성인 야오(姚)로 고칠 것을 요구했지만 끝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2년 12월 26일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두 딸 리민(李敏), 리너(李讷)와 마오쩌둥의 기밀비서 겸 정부(情婦)였던 장위펑(张玉凤)과 함께 마오쩌둥기념당을 찾아 마오쩌둥의 생일을 기렸다. 화궈펑은 “충실한 아들 궈펑이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적은 화환을 헌화했으나 그날 오후 화환은 기념당 직원에 의해 치워졌다.

아버지 마오쩌둥으로부터 중국을 물려받고도 끝내 중국으로부터 부자간의 관계를 인정받지 못했던 화궈펑은 2008년 8월 20일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숨졌다. 당시 그의 나이 82세였다. 그리고 불과 6년이 흐른 지금 출생부터 성장, 그리고 중국의 최고 통치권자 등극, 실각한 이후 초야에 묻혀 비운의 운명을 살았던 그의 일생은 점점 중국인들의 의식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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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이코노믹 정영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