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로 콜린퍼스와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피터 웨버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4)를 보면 주제인 그림만큼이나 그 시대적 배경이 눈길을 끈다. 베르메르의 작품 속 색채와 톤을 간직한 화면 속에 흰색 면으로 만든 머릿수건을 두른 그리트, 푸줏간의 순수한 청년, 시끌벅적하고 생기 넘치는 시장, 아기자기한 돌담과 좁은 골목…. 바로 17세기 네덜란드의 모습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회화란 곧 성경을 주제로 한 종교화였으며, 르네상스 시대에는 종교와 그리스·로마 신화의 주제와 함께 인간의 아름다움을 이상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성경의 내용과 신, 왕족과 귀족이 그림의 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드디어 신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들의 일상을 그린 그림과 인간이 등장하지 않고 자연이 주인공이 되는 풍경화, 그리고 더 나아가 죽어있는 사물을 그린 정물화가 등장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다. 영화 속 많은 장면에서 베르메르 역의 콜린퍼스가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들. 즉, 평범한 가정 집 내부를 배경으로 가사 일을 하는 여인들의 모습의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 공주도 왕비도 성모 마리아도 아닌 이름 모를 소녀가 진주 귀걸이를 한 모습의 그림 등이 등장하는 것이다.
특히 네덜란드 정물화는 당시 유럽 전역에서 아주 유행하고 이후 다양한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15세기에도 귀족들이 사냥을 하고 난 뒤 죽은 동물 시체를 주인공으로 그린 그림은 존재했다. 하지만 일상적인 물건들이나 음식을 주제로 한 그림은 없었다. 빌렘 클라스 헤다(Willem Claesz Heda), 피터르 클라스(Pieter Claesz), 빌렘 칼프(Willem Kalf) 등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식기와 잔에서부터 먹다 남은 빵과 과일, 네덜란드 전통 치즈까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나름의 조형미를 발산하는 대상이면서도 유한한 삶, 인생의 덧없음 등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이 정물화는 이후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라는, 인간의 유한한 인생과 허무한 삶을 주제로 한 교훈적인 내용의 회화로 세분화되어 해골, 모래시계, 비눗방울과 촛불 등 특유의 도상들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17세기는 이렇듯 주권을 되찾은 이후 경제 발전과 함께 예술이 꽃피던, 진정한 황금시대다. 이 시기 네덜란드의 미술은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당시의 시대상과 가치관을 확실히 품고 있기에 길고 긴 미술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경의 내용보다 꺼져가는 촛불과 먹다 남은 빵 한 조각의 모습이 더 인생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하는 힘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왕족도 귀족도 아닌 알 수 없는 한 소녀를 그린 것이기에, 지금까지 많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이렇듯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소박하지만 강렬한 울림을 준다.
강금주 이듬갤러리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