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김영란법을 '정(情)의 선물문화' 정착 계기로 만들자

공유
1

김영란법을 '정(情)의 선물문화' 정착 계기로 만들자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99회)] 선물은 주고받되 뇌물은 그만!

미국, 선물로 고마움 표시 문화 발달
선물의 값보다 실용성에 더 큰 관심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기뻐해
한국, 선물 비용이나 희생 크기 따져
마음 씀씀이보다 얼마인가에 신경
情으로 고난 이긴 선조 지혜 배워야

소위 ‘김영란법’이 발효된 후 처음으로 경찰에 신고된 사건이 교수가 학생에게 캔커피를 받았다는 것을 학생이 신고한 것이라는 보도를 보고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미덕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전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사제지간이 이 정도로 변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승의 날에 학생이 교사에게 카네이션을 주고, 교수에게 강의 전후로 캔커피를 건네는 것은 김영란법 제재 대상이 맞다”고 주무부처의 장(長)인 국민권익위원장이 해석을 했다니 그 학생을 나무랄 수만도 없게 되었다.

미국에 유학하는 동안 맏아들이 스승의 날을 맞던 생각이 들어 더더욱 비교가 됐다. 미국에서도 5월의 첫 번째 화요일을 ‘스승의 날’로 기린다. 그런데 스승의 날이 오기 한 달 남짓 전부터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한 달 후에 스승의 날이 있으니 그날 선생님에게 선물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알려주는 것이었다. 스승의 날이 점점 다가오면서 담임선생님의 선물이야기도 점점 잦아졌다. 필자에게는 이 모습이 너무나 생소했다.

너무 의아해서 어느 날 조용히 담임선생님에게 물어보았다. “스승의 날에 선물을 가져오라고 학생들에게 이야기해도 되나요?” 그러자 그 질문을 받고 담임선생님이 오히려 의아해하면서 필자에게 되물었다 “그럼 스승의 날에 선생님에게 선물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알려주지 않으면 누가 알려주나요?” 그러면서 그녀는 스승의 날에는 선생님에게, 어버이날에는 부모님에게 선물하는 것을 당연히 학교에서 선생님이 알려주어야 한다고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뭔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스승의 날을 일주일쯤 남겨두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학교 주변 상가에는 스승의 날 선물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매장에 나왔다. 놀랍게도 모든 선물들의 가격이 일정하게 99센트이었다. 즉, 1 달러가 안 되는 가격의 물건들이 산더미같이 진열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지어 다니면서 그중에서 자신이 선생님에게 주고 싶은 선물들을 골랐다. 선물을 고르는 학생들의 얼굴은 너무나 신나고 즐거운 모습이었다.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화훼 주문 및 유통이 줄어드는 등 원예 농가와 화훼단지 상인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화훼 주문 및 유통이 줄어드는 등 원예 농가와 화훼단지 상인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뉴시스
스승의 날이 되자 학생들은 각자 자신이 준비하고 포장한 선물들을 하나씩 선생님 앞에 나가서 전해주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가지고 온 선물을 기쁘게 받으면서 한 마디씩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주는 학생들이나 받는 선생님이나 그리고 교실 뒤에서 이 모습을 참관하고 있는 부모들 모두 즐거워했다. 선물을 다 받은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한 번 하고는 얼마 후에는 어버이날이 오니 그 때는 정성껏 부모님께 선물하라는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같은 스승의 날을 보내는 모습이 우리와 미국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선물에 대한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에 문화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문화’란 어떤 행위에 의미를 붙이는 방식이다. 당연히 나라마다 선물을 주고 받는 의미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 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정(情)’을 꼽는다. 일반인의 심성이 잘 녹아있는 대중가요도 정을 주제로 하는 것이 많다. 가수 심수봉이 애조띤 목소리로 불러 큰 호응을 얻은 ‘그 때 그 사람’이라는 노래에도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뭐냐고/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며/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 사람”이라는 유명한 대목이 나온다.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심성에 대해 탁월한 연구를 한 문화심리학자인 고 최상진 교수에 의하면, 한국인의 대인관계에서 “정은 가까움과 밀착의 정도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심리 내적 경험 속성이며, 동시에 관여된 두 사람 또는 사람들간의 친밀 밀착의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된다.

하지만 정은 사랑과 같이 격렬한 감정 상태가 아니다. 첫눈에 사랑에 빠질 수는 있지만 첫눈에 정이 들 수는 없다. 정은 오랫동안 같이 지내며 쓴맛 단맛을 함께 느끼면서 쌓여가는 감정 상태이다. 마치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자신도 잘 의식하지 못하면서 은근히 누적되는 감정이다. 그래서 사랑처럼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정은 ‘드는’ 것’이다. 상대가 곁에 있을 때는 모르고 지내다가 상대를 잃은 후에야 비로소 ‘정이 많이 들었었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래서 사랑보다는 정이 더 떼기 어렵고 슬픈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물은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물을 주는 이유는 상대를 존경하거나 좋아하거나 또는 정이 많이 들었다는 것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 받는 그 행위 자체를 통해 애정이나 고마움을 표하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물한 물건의 값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선물의 실용성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내게 필요한 물건을 선물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물건의 표면적인 값어치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다. 자녀가 어렸을 적에 입던 옷을 잘 간수해두었다가 옆집 어린이에게 주는 것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도 기뻐한다.

대인관계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쉽게 의식되지 않는 정을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까? 한국 문화에서는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를 하게끔 만든 마음씀씀이에 더 관심을 갖는다. 선물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마음씀씀이를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이다. 마음은 행동과 달리 직접 관찰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상태일 뿐이다.

그렇다면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나 사건을 보고 상대방의 마음씀씀이의 크기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제일 쉬운 방법은 그 행위를 하는데 드는 비용이나 희생의 크기를 따져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물의 값을 따져 나에 대한 마음씀씀이의 크기를 추정하는 식이다. 자녀가 입던 헌옷을 주는 마음씀씀이와는 달리 비싼 새 유아복을 선물로 받았을 때 나에 대한 호감의 정도를 느끼고 그 마음을 즐겁게 받게 된다. 이런 문화에서는 자신의 마음씀씀이를 표시하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값비싼 물건을 선물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주고도 욕 먹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고도 섭섭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 같은 섭섭한 마음은 상대의 마음씀씀이의 깊이나 무게나 기대보다 낮거나 가벼울 때 생긴다.

이렇게 나의 마음씀씀이를 상대에게 보이는 이유는 관계에서 서로 정이 들었다는 것, 즉 상당히 친밀한 관계라는 것이 표현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이 들었다는 것은 곧 두 사람의 정체성이 합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동일체 의식은 곧 두 사람이 서로 깊은 정이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생기는 의식이다. “우리는 하나”인 상황하에서는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의식이 생기며 서로 상대방의 편의를 봐주기 위한 ‘우리 편’ 의식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공사(公私)의 구분이 흐트러질 위험이 따른다. 이런 문화에서는 단순한 고마움을 표하기 위한 ‘선물’과 그 관계를 이용하여 사적인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뇌물’의 구분이 애매모호해지는 경향이 있다.

김영란법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마음도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이 반기는 것은 그동안 선물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 큰 부담을 느꼈다는 반증일 것이다. 특정 날을 기념하며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즐거운 일이고 건조한 인간관계에 샘물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관계가 급속도로 삭막해진다고 염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없는 살림에 이웃 간에 음식을 나눠먹는 훈훈한 정으로 고난을 이겨온 선조의 지혜마저 함께 잃지 않을지 염려가 된다. 문화는 변하는 것이다. 이 기회에 서로 기뻐하며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가 빨리 정착되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 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 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