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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기구한 생애를 이겨낸 멕시코 초현실주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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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기구한 생애를 이겨낸 멕시코 초현실주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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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공식 홈페이지 캡쳐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프리다 칼로가 관심이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다. 굴곡진 생애에도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고,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켜 이름을 알렸다.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를 남편으로 뒀다. 풀네임은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Frida Kahlo de Rivera)다. 1907년 출생해 1954년 사망했다.

프리다 칼로는 사진작가였던 곤살로 기예모르 칼로와 마틸다 칼데론의 세번째 딸로 태어났다.

칼로의 고난은 6살에 시작됐다. 당시 그는 척추성 소아마비에 걸렸다. 이로 인해 오른쪽 다리가 가늘어졌다. 칼로는 그럼에도 의사를 꿈꿀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고, 청춘도 만끽했다.

칼로의 운명이 바뀐 것은 1925년이다. 당시 칼로는 남자친구와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전차와 충돌사고를 당했다. 왼쪽다리에 11곳 골절상을 입었다. 요추, 골반, 쇄골 등의 부위가 골절되고 갈비뼈도 부러졌다. 9개월간 전신에 깁스를 한 채 침대를 벗으로 삼아야 했다.

칼로는 이 사고로 입은 수많은 부상으로 인해 죽을때까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사고의 여파와 소아마비 후유증 등으로 인해 그는 35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사고로 자궁을 다쳐 이후 몇차례나 임신했지만 모두 유산했다.

칼로는 전신깁스한 채로 9개월을 누워 있게 된다. 운신이 어려워지자 할 수 있던 것은 그림이다.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두 손으로 그녀는 자화상을 그리게 된다.
그림을 그리며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21살이나 많았던 그와 만나며 사랑이 싹텄고 둘은 1929년 결혼했다.

디에고 리베라는 칼로에게 애증의 존재였다. 칼로는 추후 일생 동안 심각한 사고를 두번 당했다고 말한적이 있다. 첫번째는 16살에 자신을 '부숴버린' 전차, 두번째는 디에고라고 했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하다고 했다.

칼로는 결혼으로 멕시코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의 아내라는 입장을 얻었다. 안으로는 여성편력으로 유명한 골칫거리 남편을 건사하게 됐다.

리베라의 여성 편력은 심각했다. 외도의 상대 중에는 칼로의 여동생 크리스티나까지 있다.

버티지 못한 칼로는 남편을 떠나 여행했다. 애인을 두고 동성과 사귀기도 했다. 1939년 리베라와 칼로는 이혼했다. 1년 뒤 이들은 경제생활과 성생활을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재결합했다.

세간에서는 칼로를 초현실주의라 분류한다. 칼로 자신은 이를 거부했다. 자신은 병마와 싸우고 남편의 여성 편력에 상처입었던 개인적 경험을 반영한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칼로가 작가로서 공식 경력을 시작한 것은 1938년이다. 멕시코시티 대학 갤러리 그룹전에서 주목받았다. 루브르 막물관은 그녀의 자화상을 구매했다. 칼로는 최초로 루브르에 입성한 중남미 여성작가다.

공식적인 작가로서의 생애는 길지 못했다. 칼로는 1940년대말부터 건강이 악화됐다. 오른쪽 다리는 잘라내야했다. 척추수술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53년 리베라와 친구들은 칼로의 개인전을 열어줬다. 처음으로 멕시코에서 칼로의 개인전이 열렸다.

결혼 25주년을 한달여 남긴 1954년 7월 칼로는 은혼식 선물을 리베라에 줬다. 그날 새벽 칼로는 생을 마쳤다.

리베라는 칼로가 죽고 1년 후, 코요아칸의 푸른 집을 나라에 기증했다. 칼로가 태어나고 죽을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푸른집은 현재 칼로를 기리는 미술관이 돼 있다.

리베라는 칼로가 죽은지 3년 4개월 뒤인 1957년 11월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이날 칼로가 갑작스레 주목받은 것은 전날 방영된 MBC의 새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 때문이다. 김구라, 이시영, 설민석, 타일러가 참여했다. 이들은 멕시코에 도착해 유명 화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부부에 대해 논했다.


온라인뉴스부 online@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