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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엉겅퀴 꽃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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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엉겅퀴 꽃 어머니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첫눈이 내렸다. 마침내 겨울이 닥친 것이다. 가지마다 흰 눈꽃을 피운 나무들을 바라보며 꽃들이 사라진 겨울을 어떻게 건너가야 할까 생각하니 아득한 생각이 든다. 내가 유독 야생화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야생화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야생화는 주어진 때를 기다렸다가 피고 시간의 흐름에 맞춰 물러갈 때를 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하게 뽐내는 법 없이 주변 풍경에 스스럼없이 스며들 줄 안다. 그 어색하지 않은 아름다운 어울림이 내게 고즈넉한 평화와 안정감을 준다.

꽃들이 산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면 나는 지난 시간의 사진첩 속에서 꽃들을 만나고 추억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들꽃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그 꽃을 만났던 장소와 시간, 날씨와 기온, 바람의 세기까지 이상하리만큼 세세하고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시밭길을 걸어도 꽃을 보고 걸으면 꽃길을 걷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나는 지난 사진첩 속의 꽃들을 보며 추운 겨울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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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에서 초록으로 숲의 색깔이 바뀌어가는 초여름, 산의 들머리에서 단숨에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진분홍의 매혹적인 꽃이 엉겅퀴다. 잎사귀마다 무수한 가시를 달고 사는 가시 박힌 생이지만 꽃만큼은 누구보다 탐스럽고 화려하다. 그 화려한 꽃 위에 앉아 꿀을 빠는 나비의 모습은 어느 그림엽서보다도 예쁘고 사랑스럽다. 이처럼 멋진 꽃에 어찌하여 어울리지 않는 엉겅퀴란 이름이 붙었을까. 산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린 시절 고향의 산과 들을 오가며 이 멋진 꽃과 마주칠 때마다 엉겅퀴란 이름이 붙게 된 연유가 늘 궁금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피를 엉키게 하는 약효가 있어 엉겅퀴로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엉겅퀴란 이름 외에도 엉겅퀴의 특징에서 비롯된 항가시, 항가새, 황가새, 가시나물, 야홍화, 마자초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식물에게서 인간에게 이로운 약성을 찾아내고 그에 걸맞은 이름을 생각해 낸 옛사람들의 작명 실력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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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과에 속하는 엉겅퀴는 전 세계에 걸쳐 약 250여종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엉겅퀴, 고려엉겅퀴, 큰엉겅퀴 등 자생식물 25종, 지느러미엉겅퀴 등 귀화식물 5종 등 31종이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우리나라 특산종인 고려엉겅퀴(Korean thistle)는 '곤드레 나물'로 더 유명하다.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것을 일러 '곤드레 만드레'라고 하는 것도 이 꽃이 흔들리는 모습에서 연유된 것이다. 엉겅퀴의 어린순은 가시나물이라 하여 쌈이나 비빔밥 재료로 이용하기도 하며, 지혈, 고혈압 예방, 결석 제거, 숙취 해소, 간 기능 강화, 타박상 치유 등 여러 약재로 이용한다. 즙을 만들어 먹으면 장복을 해도 부작용이 없다. 꽃은 꽃차로 잎줄기는 나물로서 전초는 발효액을 담그는 등 다양하게 이용되는 이로운 식물이다.

꽃은 초여름부터 줄기 끝에 두상화서로 피는데 크기는 4~5㎝ 정도로 색이 곱고 향기가 있다. 수많은 작은 꽃이 모여 꽃 모양을 이루는 합판화로 싱그러운 진분홍빛의 꽃무리를 이루고 벌 나비를 유혹한다. 원통형의 작은 꽃들이 모여 커다란 꽃처럼 보이게 하여 보다 많은 곤충들을 유혹하기 위한 전략이다. 잎의 가장자리를 모두 가시로 만든 것도 초식동물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어느 해인가 고향집에 들렀다가 홀로 지내시는 어머니가 엉겅퀴 꽃을 꺾어다가 빈 소주병에 꽂아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꽃송이를 세어보니 공교롭게도 여섯 송이었다.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서슬 퍼런 줄기와 잎사귀가 평생을 오직 우리 여섯 남매를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억척스레 살아온 어머니 모습만 같아 무연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우리 사는 일이 세상을 향해 꽃 피우는 일이라면 나는 어머니에게 자랑스런 꽃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엉겅퀴의 꽃말은 '독립', '고독한 사람', 또는 '경계'라고 한다. 고향집에 홀로 지내면서도 늘 자식 걱정뿐이시던 어머니는 해마다 엉겅퀴 꽃으로 피어 나를 다녀가신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