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끊기 일쑤다. 전화마저 귀찮다는 얘기.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언론사에 다시는 전화를 하지 않겠다고 흥분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 또한 언론사의 갑질이라고 할 수 있다. 기자들은 겸손부터 배워야 한다. 기자 같지 않다는 말이 최고의 찬사다. 그런 말을 듣도록 노력하라.
기협에서 “어떻게 그 어려운 출입처를 만 9년이나 나갔느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한 게 있다. 첫 번째는 도덕과 상식률이다. 두 번째는 “밥 사는 기자가 되라”고 대답했다. 법조는 법을 다루는 곳이다. 따라서 출입하는 기자도 법을 지켜야 한다. 그 바탕을 도덕과 상식으로 봤던 것이다. 도덕과 상식이 있으면 법을 어길 리 없다. 인생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다.
내가 말하는 “밥 사는 기자가 되라”에 관심이 많다. 그렇다. 기자들은 밥값을 낼 줄 모른다. 얻어만 먹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메이저 신문의 국장으로 있는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밥값 내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기자들의 경우 밥은 으레 다른 사람이 사는 것으로 알기도 한다. 대단히 잘못된 사고다.
나는 실제로 밥을 많이 사는 편이다. 기자 초년병부터 그랬다. 그러다가 더러 오해를 받기도 했다. “풍연이는 밥값을 대신 계산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 그럴 리가 있겠는가. 누가 밥값을 대주겠는가. 비싼 것을 안 먹어도 된다. 밥값을 먼저 내는 자세가 필요하다. 김치, 된장찌개면 어떤가. 밥 사는 사람이 성의만 있으면 된다.
밥값 내는 문화는 굉장히 중요하다. 보통 밥값은 내는 사람만 낸다. 그럼 어떤 모임이든지 오래갈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세 번 살 때 나도 한 번은 사야 그 모임이 지속된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여유가 있어 매번 밥을 사더라도 상대방이 얻어만 먹으면 얄미울 때가 있다. 그때부터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다.
2019년은 남에게 밥을 많이 사는 해로 만들자. 그럼 돌아오는 게 더 많다. 경험칙상 그렇다. 밥값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오풍연 주필 poongye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