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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바다의 향기를 품은 꽃 '해란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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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바다의 향기를 품은 꽃 '해란초'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마침내 12월이다. 비 한 번 다녀간 뒤 빙점 아래로 곤두박질친 수은주만큼이나 마음도 덩달아 얼어붙는 느낌이다. 오·헨리의 명작 '마지막 잎새'가 생각나며 이 추운 계절을 어떻게 건너가야 할지 궁리가 많아진다. 며칠 전 거여동의 한 작은 도서관에서 '꽃을 보고 걸으면 가시밭길도 꽃길이 된다'는 제목으로 인문학 강의를 했다. 감각기관 중에서 우리는 시각을 통해 가장 많은 정보를 얻고 세상을 이해한다. '눈길 가는 곳으로 마음이 간다'는 말처럼 시선이 닿는 곳에 마음이 머문다.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떤 이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고 어떤 사람은 희망의 빛을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꽃들이 모두 사라진 겨울이 되면 나는 지난 계절에 보았던 꽃들을 생각한다.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꽃 사진들을 펼쳐보며 그 꽃을 보았던 때를 떠올리고 다시 꽃 필 날을 기다린다. 사진 파일 속에서 찾아낸 해란초는 꽃도 어여쁘지만, 그 꽃을 만났던 강원도 고성의 해변 풍경과 파도소리, 뺨을 스치던 바람결까지 고스란히 되살려준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답사 1번지로 꼽히는 강원도 고성의 화진포 바닷가에서 만났던 해란초는 그때의 기억을 어제 일처럼 또렷이 환기해준다. 이쯤 되면 꽃은 탐미의 대상을 넘어 지난 기억을 되살려 주는 추억의 종합세트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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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란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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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란초

해란초(海蘭草)는 이름만 들으면 '바닷가에 피는 난초'라 오해할 수도 있지만 해란초는 현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분포하여 자생한다. 모래땅 속 뿌리는 옆으로 길게 뻗으면서 자라는데 마디마다 새싹이 돋아나서 꽃무지를 이루며 줄 지어 피어난다. 해란초의 잎은 다육질로 흰 빛이 도는 녹색인데 돌나물처럼 주걱 모양의 길쭉한 타원형, 또는 피침꼴이지만 돌나물보다 얇고 넓고 끝이 뾰족하다.

키는 15~40㎝ 정도로 자라는 데 세찬 해풍이 부는 바닷가에 자라다 보니 곧추서기보다는 옆으로 길게 뻗으며 자라는 게 대부분이다. 꽃은 한여름인 7∼8월에 노란색으로 피는데 꽃받침은 깊게 5개로 갈라지고 화관은 입술 모양으로 윗입술은 곧게 서서 2개로 갈라지고 아랫입술은 3개로 갈라진다. 작고 노란 꽃들이 여러 개가 모여 달리며 피는 모습이 여간 예쁘지 않다.

해란초란 이름만 들으면 여리고 곱기만 할 듯한데 바닷가에 사는 대부분의 식물들이 그러하듯이 해란초도 생명력이 강하다. 거센 바닷바람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려니 추위와 가뭄에도 강하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 꽃이 고와서 최근엔 조경에도 이용하는데 물 빠짐이 좋고 햇볕이 잘 드는 곳이면 어디서나 잘 자란다. 한꺼번에 꽃을 피우지 않고 차례차례 꽃을 피우기 때문에 오랫동안 꽃을 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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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란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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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란초

해란초와 같은 집안 식구로 좁은잎해란초가 있다. 해란초에 못지않은 아름다움과 개성이 넘치는 꽃이지만 잎이 가늘고 길며 꽃도 가늘어 해란초와 어렵지 않게 구분된다. 아쉬운 것은 좁은잎해란초는 남쪽에서는 볼 수 없고 북한지방에서만 자란다는 점이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좁은잎해란초를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페라 '투란도트'를 보면 투란도트 공주가 칼리프 왕자에게 이런 수수께끼를 낸다. "이것은 어두운 밤을 가르며 무지갯빛으로 날아다니는 환상이다. 그리고 모두가 바라는 환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다시 살아나기 위해 밤마다 태어나서 아침이 되면 죽는다…"

정답은 다름 아닌 '희망'이다. 12월의 달력 한 장의 무게는 지난 열한 달의 달력 무게와 맞먹는다는 말이 있다. 현실이 제아무리 팍팍해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꽃 필 봄날을 기다리며 얼마 남지 않은 2019년을 곱게 마무리하는 12월이 되었으면 싶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