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일본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1990년 한때 49%에 달하며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반도체기업 상위권에서 일본 기업의 이름은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일본 반도체 기업의 흑역사를 살펴보면 먼저 NEC와 히타치제작소가 설립한 D램 반도체 업체 엘피다메모리가 지난 2012년 파산했다. 또 히타치와 미쓰비시, NEC가 힘을 합친 르네스사일렉트로닉스도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마지막 '일본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도시바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도 한미일연합에 넘어갔다.
일본 반도체 기업은 세계 시장을 제패한 후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미국이나 독일이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전환한 데 반해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새로운 변신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그동안 일본 기업의 장점이었던 가격경쟁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러나 단순한 가격경쟁은 신흥국인 한국과 대만 기업들과의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투자 판단의 지연과 적기 구조조정에 실패함으로써 반도체 왕국으로서의 일본의 영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일본은 한때 반도체뿐만 아니라 액정 패널 사업에서도 세계 선두주자였다. 그런데 액정 패널 사업도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파나소닉이 액정패널 사업에서 이미 손을 뗐고, 샤프는 대만 훙하이정밀에 넘어갔으며, 마지막 남은 재팬디스플레이도 정부의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았음에도 미래가 불투명하다.
이처럼 한때 세계 시장을 호령한 일본 반도체기업과 액정패널기업의 몰락은 한국기업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반도체기업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대만과 중국에 쫓기고 있고, 액정패널사업도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중국이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있다.
삼성전자가 한발 앞서서 투자를 단행하고 가격경쟁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발빠른 전환을 한 것도 세계 시장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의 '3류 정치'가 갈길 바쁜 우리 기업들의 발목을 잡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