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일상화…갈등 역효과 경계해야

공유
1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일상화…갈등 역효과 경계해야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181회)] 심리적 거리는 대화의 양보다 질에 달려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 그동안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면 다툼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 그동안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면 다툼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사진=로이터
지난 3월 16일 대구에서는 어머니가 혼자 힘겹게 집안일을 하는데 방에서 빈둥빈둥 누워있는 남동생과 다툼이 격해진 끝에 남동생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일이 벌어졌다.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던 이 여성은 코로나19 사태로 대구의 부모님 집에서 재택근무 중이었다. 이 외에도 "코로나19로 혼자 육아를 책임지는 것이 답답해 남편에게 바람 쐬러 가자고 했다가 시비가 붙어 폭행까지 당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연도 있다. 폭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코로나19로 인한 '재택' 스트레스가 폭력적인 성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털어놓는 글이 온라인에 줄을 잇고 있다. "둘째를 임신해 만삭인데 코로나 사태로 홀로 가정보육을 3주째 하다 보니 자꾸 아이에게 소리 지르고 화를 내게 된다. 코로나 때문에 내가 미쳐가는 것 같다"고 하소연하는 어머니도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점차로 일상화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비록 코로나19가 진정되어 다시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사회생활에서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일사불란(一絲不亂)' 하게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한 조직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잦은 회식을 하거나 활동을 공유하는 것을 당연시했던 분위기가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재택근무 등 원격으로 활동하는 분야가 확산되어 대면활동의 빈도가 줄어들고 그 강도(强度)도 약해질 것이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만든다. 그동안 부모는 일과 회식 등 공적인 일로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적었고, 또 자녀들도 공부 등으로 바빠서 서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던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다행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 변화를 통해 가족끼리 많은 시간을 보내고 여행 등 여가활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많아져 가족관계에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가족이 화목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내재된 갈등이 분출되는 역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남동생에게 흉기를 휘두른 누나도 떨어져 있을 때는 게으른 동생의 모습을 그럭저럭 참고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집에서 살며 어머니를 홀대하는 동생을 직접 대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그동안 쌓여있던 동생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다.

​코로나19 영향 재택 근무 스트레스
일상생활에서 많은 변화 일으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가훈으로 정한 가정이 많듯이 가족 간의 강한 결속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를 강조한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가족끼리 함께 할 유흥거리나 여가를 함께 보내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리고 가족끼리 대화도 별로 하지 않는다. 물론 '부부일심동체(夫婦一心同體)'이고, "내 속으로 난 자식"이기 때문에 말을 안 해도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서로 그 마음을 잘 모르고 지내는 것이 또한 가족이기도 하다.

마음은 몸처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알기 어려운 것이 '마음나누기'이다. 상대방의 표정이나 말투를 통해 어느 정도 그 마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섬세한 마음의 움직임은 표정이나 말투를 통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또 얼마든지 가면을 쓰고 가식적인 표정을 짓거나 말투를 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을 포함한 대인간계에서는 대화를 통한 '마음나누기'가 중요하다.엄밀히 말하면 두 사람이 서로 말을 한다고 해서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니다. 대화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다. 대화는 '대답할 대(對)'와 '말할 화(話)'로 구성된 단어이다. 이 단어의 순서를 잘 음미해보면 대화의 본질이 잘 나타나있다. 말하는 것(話)보다 대답하는 것(對)이 앞에 놓여 있다. 즉, '말하기'보다 '듣기'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고, 또 말하기 전에 먼저 대답하는 것이 대화라는 의미도 있다. 대답의 사전적 정의는 "상대가 묻거나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해답이나 제 뜻을 말함"이다. 즉 상대방의 말을 먼저 듣고 상대방이 무엇을 질문하거나 요구하는지를 잘 알아야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다.

대조적으로, 독백(獨白)은 '홀로 독(獨)'과 말하는 사람의 이름 뒤에 붙어 '말씀드리다'는 뜻을 더하는 접미사 '백(白)'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독백은 '자기 혼자 이야기하는 것'이다. 독백에는 말 그대로 상대가 없다. 그냥 혼자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일방적으로 쏟아놓은 것일 뿐이다. 정말로 독백에는 상대방이 '안중(眼中)'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독백을 한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말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식적으로는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혼자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족 간의 나누는 말이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인 경우가 많다. 가족 간의 대화가 일방적인 설명이나 훈계와 같은 독백으로 쉽게 흐르는 데는 우리의 문화도 크게 한몫을 하고 있다. 우리 문화는 '가족동일체' 의식이 강하다. 가족은 동일(同一)하기 때문에 구태여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서로 다 안다'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진정으로 화목한 가정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단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所望)'에 불과할 뿐 그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것을 구태여 표현하면 유대를 해치고 그나마 유지되던 분위기가 나빠질까봐 참고 사는 것일 뿐이다.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인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는 상대가 나와는 다른 독립적인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독립적인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가 나와는 다른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대가 나와 '하나'라든지 '같다'고 여긴다면 독립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런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부부간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어야 한다'는 '부부일심동체' 의식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함께 지내는 시간 많아진다고 해서
가족화목 아니라 갈등 폭발할 수도

자녀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문화는 '부모-자녀 동일체' 의식이 강하다. 이런 문화에서는 자녀가 부모와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자녀가 부모와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녀가 부모와 다른 생각과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름은 부모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각하고 억제할 수 없는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니면 부모에 대한 반항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래서 '머리가 더 크기 전에'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지나치게 격한 반응을 보이며 자녀의 생각이나 감정을 틀린 것으로 억누르려 한다.

서로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되 서로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진다. 독립된 인격체라 해도 주인과 노예의 관계처럼 수직적이면 아랫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단지 명령과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우리 가족문화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모와 자녀는 다른 세대(世代)이기 때문에 생각과 가치관이 다를 수 있다. 또 달라야한다. 만약 자녀가 부모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어느 가족이나 발전은 없다. 발전은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할 때 주어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어느 조직보다 흉허물이 없는 사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관계이다. 하지만 동시에 제일 상처를 많이 줄 수 있는 관계이다. 다른 조직과는 달리 일정기간 동안은 싫어도 함께 살아야만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싫다고 안 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가정은 그래서 '천국'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지옥'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가정에서 맛본 천국과 지옥은 가족 외의 다른 관계에도 전이(轉移)가 된다.

코로나19는 가족들에게 지금까지 늘 부족해서 아쉬웠던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지금까지 가족과 나눈 대화가 진정한 대화인지 아니면 독백에 불과했는지를 돌아보자. 만약 독백에 불과했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인정하고 노력해자. 코로나19로 뜻밖에 주어진 시간이 보다 행복한 가정생활로 가는 밑거름이 된다면 그나마 큰 보상이 될 수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
한성열 고려대 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