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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광릉숲에 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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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광릉숲에 갔다가

백승훈시인
백승훈시인
에어컨을 켰다. 올해 들어 처음 가동이다. 더위를 많이 타지 않는 체질 탓에 웬만하면 에어컨을 켜지 않는데 유월로 접어들면서 일찍 찾아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탓이다.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느라 봄이 다 가도록 집 가까이에 있는 북한산 둘레길만 열심히 걸었다. 날마다 같은 길을 걸어도 숲은 날마다 같은 듯 새로운 모습을 펼쳐 보여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모양이다. 매일 만나는 둘레길을 떠나 새로운 숲 풍경을 기대하며 차를 타고 광릉숲을 찾았다.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 했던가. 바야흐로 신록은 짙어질 대로 짙어져 초록물이 뚝뚝 듣는 말 그대로 초록 그늘에 풀이 꽃보다 아름다운 시절이다. 녹음이 짙게 깔린 호젓한 숲길을 걸을 생각에 마음이 저만치 앞서 달린다. 광릉숲은 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의 왕릉인 광릉의 부속림으로 지정되면서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며 엄격하게 관리, 보존되어 온 숲이다. 능림으로 지정한 이후 시험림으로 관리되어 개발과 훼손을 피하였기에 지금도 원시림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수림은 인공림이다. 국립수목원이 있는 광릉 숲엔 식물, 곤충, 조류 등 5710종의 생물이 산다.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생물의 보고인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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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숲은 누가 보아도 명품숲임에 틀림없지만 포천이 고향인 내겐 특별한 추억이 서린 장소이기도 하다. 중‧고등학교를 향리에서 다닌 까닭에 광릉은 단골 소풍 장소 중 하나였다. 선생님의 인솔하에 시오리 길을 걸어서 광릉숲까지 소풍을 가곤 했는데 그 때 마주한 광릉숲은 마냥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민둥산이 대부분이던 그 시절, 유독 광릉숲만은 도로변으로 줄 지어 선 곧게 뻗은 전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능 주변의 멋스러운 소나무와 울울창창한 숲 속은 동화 속 요정이 사는 신비의 숲처럼 느껴졌다. 그 숲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도시락을 먹고 오락을 했고 백일장에 시를 써서 상을 받기도 했다.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지금도 그곳에 가면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세상은 늘 기대와 어긋나기 일쑤다. 코로나 때문에 수목원 입장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수목원은 물론이고 광릉과 도로변을 따라서 나무 데크가 깔린 산책로까지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나의 진입을 완강하게 막았다. 온통 푸르름으로 일렁이는 숲엔 싱싱한 생명의 에너지가 넘쳐나는데 잠시나마 그 숲의 일부가 되어 그 숨결을 느끼고자 했던 나의 소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비록 옛 추억을 더듬으며 호젓하게 산책을 즐기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그냥 발길을 돌리기엔 아쉬워 잠시 천변 산책로를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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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엔 어느새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숲속엔 선홍빛 산딸기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검은물잠자리떼가 수면 위를 낮게 날며 군무를 추는 모습이 보인다. 산란을 하는 모양이다. 세상이 온통 코로나19 사태로 어수선해도 자연의 시계바늘은 묵묵히 다음 계절을 향해 가고 있다. 인간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차분하고 왕성하게 풀과 줄기, 잎사귀를 흔들며 뜨거워지는 여름을 노래하고 있다.
세상만사는 요지경처럼 여전히 복잡다단하지만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당장은 어수선해도 봄 가면 여름 오듯 모든 것이 곧 제자리를 찾아갈 것을 믿는다. 등산가가 산을 오르다 암벽을 만나면 바위를 탓하지 않고 돌아서 가듯 우리에게 닥친 현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머지않아 닫힌 광릉숲도 열리고 산책로의 바리케이드도 치워질 것이다. 그날이 빨리 오길 바라는 것도 지나친 욕심일까.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