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서정주의 감성을 불러오는 서(西)에서 오는 바람과 이를 영접하는 산내들의 초목, 중첩적 의미의 갈 바람은 황금들판의 곡식들과 과실을 갈무리함과 아울러 가을 갈대의 브라운을 타고 종료되는 계절의 마무리를 아우른다. 삶에서 방위는 색은 일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순종과 저항의 이미지를 소지한다. 작가 허숙이는 자신의 마음을 캔버스 위에 걸고, 성숙을 넘어 완숙을 지향하는 개성을 보인다. 그녀에게 자연만 있다면, 화구나 인물들이 이뻐 보이고, 즐기는 그림은 느린 진전을 보인다. 긴 호흡의 내공은 전투적 속성을 자연스레 멀리한다.
서양화가 허숙이는 조형 예술(Plastic Art)에 집중한 전시회에서 유화(Acrylic & Oil) 작업으로 모진 바람이 멈추고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희구하는 바람 이미지를 강조한다. 계절과 순환을 빌린 제목들이 진설되고, 작가 자신은 몽유도원을 걷거나 유희적 삶의 주인공이 된다. 그녀의 작품 속에 묘사되는 작금의 사계는 몽환의 원색을 구사한다. 그녀의 작품들에서 점・선・면을 걷어내다 보면 동화적 추상성은 도드라지고, 밤나무골 소녀의 순박한 모습에서 머위처럼 푸른 유년, 연밥 따는 아낙의 모습들이 접사 되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가 다양한 크기로 집중 작업한 최근의 작품들은 ‘사계-바람 서Ⅰ’(91.0×91.0cm, 2019), ‘사계-바람 서 Ⅱ’(91.0×91.0cm, 2019), ‘사계-바람 전’(53.0×41.0cm, 2020), ‘사계-여름 바람’(60.6×72.7cm, 2019), ‘사계-봄바람’(60.6×72.7cm, 2020), ‘사계-갈 바람’(72.7×60.6cm, 2019), ‘사계-바람’(91.0X91.0cm, 2019) 등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회에서 자연의 일부인 ‘바람’을 화두로 삼은 작품들을 출품한다. 유기 생명체로 제 몸에 난 상처를 치유하고, 작품으로 기록한 것이 자연색, 그 색채는 시련을 극복하고 꽃을 피워내는 사랑의 공간을 보여준다.
작가에게 계절에 따른 색의 변주는 극명해서 기본색만으로도 작업 충동에 빠져들게 만든다. 작가 허숙이는 사계의 풍광을 가슴에 안고 야외작업을 즐겨 하면서, 자연이 조율해내는 오묘한 기교를 습득한다. 마음의 길 같은 부지런한 초록을 유기적 통로로 삼는다. 그녀는 중심 통로는 없을지라도, 어딘가로 연결되는 자연의 미로가 존재함을 확신한다. 자연의 색채는 세상을 받아들일 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상황과 심경, 심상을 내적 체험으로 조형화한다. 삼각지 허름한 친구의 화실에서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화작(畵作) 한 지 사십여 년의 모습이다.
‘사계-바람 서Ⅰ’(91.0×91.0cm, 2019)와 ‘사계-바람 서 Ⅱ’(91.0×91.0cm, 2019):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나무, 서쪽 바람을 가까이 맞이하려는 여름과 가을, 화려한 옷으로 향연을 채비한다. ‘사계-바람 전’(53.0×41.0cm, 2020): 또 다른 계절이 다가오는 기다림과 설렘, 두려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사계-여름 바람’(60.6×72.7cm, 2019): 녹색 바람에 인간이 숨을 쉬고 자연을 만끽한다. 고마움이 깃든 바람이다. ‘사계-봄바람’(60.6×72.7cm, 2020): 굳었던 땅에 봄바람이 힘겹게 꽃 색깔을 내기 위해 내뿜는 봄. 자연과 인간이 즐기려고 움직임을 시작하는 봄이 묘사된다. ‘사계-갈 바람’(72.7×60.6cm, 2019): 인간이 만끽한 가을 잔치에는 상처가 따르지만, 바람은 치유의 능력을 보인다. 제목 확장으로 연결된 ‘사계-바람’(91.0X91.0cm, 2019): 사랑하는 아이에게 시련의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다.
장석용(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